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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난로 구들방

2002년 세계 꽃박람회가 태안군 안면도에서 열렸다. 그곳이 적합지였던 이유는 해양성의 서늘한 기후 덕이다. 꽃은 따뜻한 내륙보다는 해양성 기후에서 열흘은 더 산다고 한다. 문득 사람도 서늘한 곳에 살면 더 오래 살까 궁금해진다.

‘몸이 따뜻해야 암이 덜 생긴다’,‘아침에 냉수를 마시면 장에 좋다’, ‘아침에 찬물을 마시면 장이 놀래서 스트레스가 된다.’ 뭐가 옳은 말인지 헷갈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겨울에는 따끈한 온돌에 몸을 지졌으면 하는 게 많은 사람들의 바람이다. 요즘은 기름 값이나 전기료가 계속 올라 따뜻하게 한겨울을 나는 것이 부담스럽다. 올해는 평소에 준비해 두었던 방장을 놓아 구들방을 하나 준비할 요량이었다.‘

2014년 사월 어느 날 순성면 반딧불이도서관에서 우연히 이화종님의 ‘벽난로 구들방’이라는 책을 보았다. 호기심이 이는 치기를 달래며 집에 와 훑어보니 바로 이거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실에서 불을 때면 벽난로를 통하여 실내공기를 덥히고 화기가 구들을 덥혀 온돌의 효과를 보게 되는 방식이다. 다음날 강원도 화천에 사는 작가와 전화통화를 하여 수강생을 모은다면 강의를 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바쁘긴 하지만 그렇게 하겠다는 답변이었다. 잔뜩 고무된 나는 다음 날 당진시청 평생교육센터를 노크했다. 나의 설명을 들은 담당자는 윗분들과 상의해서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며칠 후의 답변은 수강생만 모아진다면 예산지원은 얼마든지 하겠다는 답변이었다. 그 후 신성대학이 구 군청자리에 설치한 평생교육원에 위탁하여 수강생을 모집하겠다는 전갈이 왔다. 모집 광고를 내자 당진 뿐 아니라 서울, 청주 등지에서도 신청자가 쇄도했다. 그 바람에 시당국은 육십여 명의 신청자를 삼십 명으로 줄이느라 애를 먹었다고 한다.

교육은 예산으로 하지만 실습은 수요자부담이라는데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다기에 내 집을 실습장소로 제공했다. 약 삼일간의 작업 끝에 이중 구들이 완성되었고 벽체와 창호 지붕 등 집을 완성하는데 까지 이십여 일이 걸렸다. 소요비용은 여섯 평 건축에 육백여 만원 들었다. 그 덕분에 지난겨울은 그야말로 아주 따뜻하게 지낼 수 있었다. 장작 5~6개비로 따끈한 구들에 몸을 녹일 수 있었다면 믿기지 않을 것이다. 100% 연소가 되어 재를 한 달에 한 번 치운다면 이 또한 놀랄 일이 아니겠는가. 또한 연기가 하나도 나지 않는 것이 너무나 신기할 따름이다. 도시가스 혜택을 보지 못하는 농촌의 난방문제는 이거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 누구에게나 자신 있게 권하고 싶다.

그 행사의 강의를 맡았던 이화종 선생님은 장애아들에게 구들방을 지어주면서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다고 한다. 내가 아는 상식을 여러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 책을 쓰게 되었다고 소개하면서 소탈하게 수강생들과 작업하던 그의 모습에서 진정한 인간의 순수성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떠한 격식도 필요 없고 다만 흘리는 땀방울이 내게는 향기롭게만 보이던 사람, 나는 그분을 통해서 참다운 인간의 단면을 보았다.

한겨울 추위에 언 몸을 온돌방에 누이는 순간 느껴지는 희열은 누구나가 가질 수 없는 그 어떤 행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든 살을 넘기신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온돌문화에 대하여 문화원장으로서 할 말이 생겼다. 그때 수강생 삼십 명 앞에서 한 인사말이 떠오른다.

“여러분 수고 많으셨습니다. 앞으로 1개월을 불 때보고 만족하면 여러분을 초청해서 하우스콘서트를 열겠습니다.”

이제 잔치를 준비 해야겠다.

종(鐘)

내 이름 첫 자는 쇠북종鐘자이다. 선친께서 일러주신 글자였는데 호적상의 한자는 술잔종鍾자로 되어 있다. 어려서는 관심도 없었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이름자에 술잔종자를 쓸 리 없지’ 하면서 의문을 갖다가 두자가 통용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정부에 등록한 한자와 다른 쇠북종자를 고집스레 쓰고 있다.

어렸을 적 이름자에 종자가 들어가는데다가 머리가 크대서 ‘종대가리’ 로 놀림을 받아왔다. 학생모자가 맞는 게 없어서 뒤를 타야 했고 지금도 향교에서 제례복을 입을라치면 두건이 작아서 뒤를 터서 쓰곤 하니 별명도 그럴싸했지 싶다. 하지만 손자 녀석도 머리가 큰 건 집안의 내력이면서 머리가 크니 하드용량(?)이 클 뿐 불만일 것은 없다.

초등학생 때 정오만 되면 교회에서 들려왔던 종소리는 지금도 귓전을 맴돈다. 일하다가도 교회로 달려와 정확한 시간에 종을 울렸던 종지기 신 집사는 무슨 생각을 종소리에 실어 보냈을까. 수업 끝을 알리던 학교 종은 왜 그리도 더디게 울렸던가. 개발 년대를 대표했던 새마을 운동은 새벽종이 아니었다면 무엇이 그 역할을 했을까. 새벽녘 천지를 깨우는 산사의 은은한 종소리는 잠 없는 늙은이들을 얼마나 뒤척이게 했던가.

천안에 근무할 때 인근 진천에 있는 종 박물관을 찾은 적이 있었다. 원광식 선생이 평생을 수집하거나 제작한 종 150여점을 기증해서 세우게 된 국내 최초의 박물관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상원사종과 가장 큰 종인 성덕대왕신종이 1.5분의 1로 축소된 범종을 전시하고 있었다. 종소리만 들어도 모든 중생의 번뇌가 없어지고 지혜가 자라나며 지옥에서 벗어나 삼계에 윤회하는 일도 없이 성불할 수 있다는 범종소리가 은은히 들리는 듯 했다

지난해 10월 어느 날 태안반도를 찾았다. 일행이 찾은 청산수목원은 저녁노을과 함께 2002년 세계 꽃 박람회의 추억을 회상하게 했다. 충청남도가 세계원예생산자협회와 함께 했던 행사에 관람객 100만 명을 동원하는 대 성공을 이루었다. 농협중앙회 일선책임자로 기여했던 추억이 아련했다. 그림정원에 들어서자 마주치는 대형그림에서 종소리가 울리는 듯 했다. 밀레가 만종을 그리면서 농부가 일손을 멈추고 기도를 하게 만든 동기는 멀리서 들려온 종소리임에랴.

국가의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보신각종은 서울시민의 뇌리에 꽈리를 틀어 앉은 지 오래다. 지방자치단체들도 나름의 종각을 지어서 중요행사에 등장을 시킨다. 천안에 근무할 때 천안시민의 종 건립에 일조를 하고 그 다음해 1월 1일 새벽 타종행사에 참여한 기억이 새롭다.

내 집엔 울타리가 없다. 사방에 나무가 심어져 있고 외딴집이라서 사람 발길이 드물다. 더구나 언덕이다 보니 동리사람들이 마을 오는 일도 없다. 하지만 누가 밖에 와서 찾아도 안에서는 잘 들리지 않는 문제가 있었다. 지난해 한 여름 동리 구멍가게에서 지인들과 맥주로 더위를 식혀가면서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동석했던 0사장이 며칠 후 내게 종을 들고 왔다. 별채에 달아서 외지인이 방문했음을 알리고 혹여 액운이 따라왔으면 달아나라는 용도로 치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인삼농사를 짓는 0사장이 종을 취급하는 친구가 있어 얻어왔다는데 나에겐 요긴한 선물이면서 받기만 해서야 되겠나 하는 생각이 부담이다.

최근에 내 집 옆으로 집을 짓고 이사 온 이웃이 젊은 부부라서 이른 아침엔 종을 칠 수 없다. 내 좋다고 남의 곤한 잠을 깨울 수는 없는 일이다. 때로는 정자에 앉아 있다가 손님이 오면 종 한 번 치고, 돌아가면 두 번을 치고… 손님이 오고 간 것을 안사람이 알아서 차를 내오고 가져가니 여간 신통하지 않다.

종을 선물해 준 0사장의 인삼농사가 풍년들라는 마음을 담아 세 번을 친다. 주변의 액운을 물러가라고 여덟 번(백팔번뇌를 생각하며)을 친다. 어지러운 시국이 안정을 찾기 바라는 마음으로 서른세 번을 친다. 자칫 흩어진 정신을 한데 모으는데 종소리만한 최음제가 없다. 종대가리님(?)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마을사람들이 행복해지면 좋겠다.

(2016. 11. 10)

역사교과서 국정화 國定化 뒤로 미루자

2015년 10월 27일 박근혜대통령은 국회 시정연설을 했다. 내년도 국가 살림살이를 설명하고 국회의 협조를 당부하는 대통령으로서의 행보다. 지나온 임기동안 늘 그랬으니 국민적인 지지를 받을 만하다. 임기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국정운영의 핵심과제로 노동, 공공, 교육, 금융의 4대개혁을 제시했던 차에 특별히 목소리를 높이거나 상기된 표정은 없었다. 그런데 ‘역사교육의 정상화’를 언급하면서 표정이 싸늘하게 바뀌었다. 야당과 국민을 비난과 설득의 대상으로 여기는 연설의 지속이었다. 대통령이 나서서 국론을 분열해놓고 4대개혁이 가능할까.

우리의 역사를 바로잡아 국민적 정체성을 확보하자는 의도였다면 국민통합과 화해를 겨냥했어야 했다. 4대 개혁과제도 임기 내 성과를 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교과서의 국정화에 대통령이 직접 나서고 청와대가 진두지휘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국회의원 선거구 획정 규율도 정하지 못했다. 보수와 진보, 야당과 여당을 극단으로 몰아넣고 시민사회를 양분하여 무엇을 얻고자하는 걸까.

최소한 여섯 가지 관점에서 대통령이 보이는 최근의 행보는 패착이 아닐 수 없다.

첫째는 국정화의 의도가 불순하다.

박정희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지우기 위함이고 이승만 대통령을 건국의 아버지로 각인하는 일이라면 박근혜대통령이 할 일이 아니다. 배나무 밑에서 갓끈 고쳐 쓰지 말고 참외밭에서 운동화 끈 다시 매지 말라는 속담도 모르나. 훤한 속내를 다른 맹랑한 주장으로 감추려 들어서는 안 된다. 고대사와 현대사로 구분하여 중국의 동북공정 등 동북아 역사 왜곡을 바로잡겠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1978년부터 3년간 역사전쟁을 치루지 않았던가. 일제 하수인 노릇을 했던 이병도 계열의 식민사학과 재야 사학자들 간의 전쟁에 다시 불을 붙이자는 것인가. 민도가 높아졌음을 알아야 한다.

둘째는 국정화만이 역사교육을 정상화하는 길이라는 생각은 큰 오산이다.

검인정체제를 보완하면 될 일이다. 그동안 검인정체제였기 때문에 교과서 표기에 좌편향이 많았다면 교육부가 검인정과정을 통해서 수정했어야 한다. 앞으로 국민적인 합의를 통해서 고쳐나가면 될 일이다. 자기얼굴에 누워서 침 뱉는 꼴이 아니고 무엇인가.

셋째는 획일적 사고보다는 다양한 사고를 해야 한다.

고령층 대다수는 정부여당의 주장에 무비판적으로 동조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만난 분 중에 교육계에 헌신하신 분인데도 불구하고 정부여당이 추진하는 것은 따라야 한다는 분이 있다. 역사를 사실대로 표기하고 왜곡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데 대해서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 가지 사안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을 획일화 하자는데 동조할 수 없다. ‘균형 잡힌 역사인식’과 특정정파가 주장하는 ‘올바른 역사인식’은 분명히 다르다

넷째는 학생들은 우리의 미래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초.중,고교 교육에서 우 편향으로 단일교육 받다가 대학에 가서 다양한 해석과 조우했을 때 젊은 세대들이 받을 충격을 생각해야 한다. 단답형이나 사지선다형에 익숙한 학생들은 다양한 사고를 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았다. 이렇듯 다양한 해석과 추론이 가능한 역사교육을 국정화로 획일화하자고 들면 학생들에게 경직된 사고를 심어주는 우를 범할 것이다.

다섯째는 모든 일을 밀실에서 또는 조급하게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

공개적으로 투명하게 국민의 의견을 수렴해야한다. 청와대가 지침을 주고는 교육부가 한 일이라고 발뺌하는 것이야말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일임을 각성해야 한다.

여섯째는 현재의 교과서가 좌편향이라는 집권층의 견해에 동의 할 수 없다.

좌편향, 우편향 보다는 긍정적 인식과 부정적 인식으로 해석해야 옳다. 현행 역사교과서에 잘못된 서술이 있다면 사회적 논의와 학문적 토론을 거쳐 수정하면 될 것이다. 역사적 관점에 대한 해석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과 국정화로 학생들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준다는 발상은 논의의 비교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언제부턴가 당,정,청의 일사 분란한 모습이 지고지순한 가치로 각인돼 왔다. 유력대권주자의 정치적 계산과 공천탈락을 의식하면서 침묵하는 다수의 의원과 친박의 돌격대를 자처하는 일부의원들의 동상이몽이 공존하는 정당, 이것이 새누리당의 현 주소다. 당은 청와대를 비롯한 정부가 집행할 정책을 개발하고 민의를 반영하는 기구이다. 그런 만큼 청와대가 나서서 무불간섭하고 여당의원들은 양식과 양심을 저버리고 단일대오로 숨죽이는 구태를 시급히 청산해야 한다.

대통령은 선거와 정치는 국회에 맡기고 국정운영과 개혁과제의 실천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나라경제가 침체국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청년실업이 심각한 상황에 몰려있는데 뜬금없는 역사교과서 국정화로 날을 새울 일은 더욱 아니다. 이제라도 청와대를 포함한 정부와 여당은 국정화를 미루는 고뇌를 국민 앞에 보여야 한다. 의회정치를 존중하고 여야 타협을 가능하게 하는 분위기를 잡아 나아가야 할 것이다.

( 2015. 11. )

알파고와 여인의 웃음

인공지능 알파고(AlphaGo)와 한국이 낳은 바둑 귀재 이세돌의 세기적인 대결은 알파고의 승리로 끝났다. 인간이 만든 소프트웨어가 인간보다도 더 완벽하게 추론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거의 모든 일을 인공지능에게 빼앗길 것이라는 가정이 어렵지 않다.

47년 전, 고등학생일 때 경제와 사회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머지않아 개인전화기를 들고 다니게 되고 마이카시대가 될 것이다.”
그 때는 꿈같은 얘기로 들었다. 불과 50여년이 지난 지금은 어떤가. 손 전화기 없는 사람을 보기 어렵고, 자동차 없는 사람이 드물다.

이세돌이 2016년 2월 22일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지난해 10월에 열린 알파고와 판후이 2단의 기보를 봤을 때 알파고는 이세돌 자신과 승부를 논할 수준이 아니라고 했다. 그만큼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이세돌은 인공지능에게 완벽하게 패했다. 그러고는 인류가 진 게 아니라 이세돌이 진 거라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이 대국으로 이세돌은 2억여 원의 상금을 받았다. 이에 비해 알파고를 개발한 구글회사의 주가 총액은 무려 58조원이나 증가했다. AT강국을 자처하는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너무나 크다. 50년은 고사하고 불과 5개월 만에 인간의 지능을 뛰어 넘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한 것이다. 이렇듯 인공지능의 발전은 이제 시간을 다투는 일이 되고 있다.

세탁기가 빨래를 대신하고, 로봇 청소기가 집안 구석구석을 청소해 주고, 사람이 없어도 자동차가 알아서 다니는 시대다. 하지만 우리가 가장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역시 일자리 문제다. 인공지능이 천재 기사만큼 바둑을 둘 정도라면 우리의 직장 업무를 자동화하는 것쯤은 이제 시간문제일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자동화기술의 확산으로 청년일자리가 많이 줄어 든 상태인데 말이다.

47년 전, 우리 은사님이 유추 하신 것처럼 나는 이런 생각을 가진다. 만약 감정을 가진 로봇이나 인조인간이 등장한다면 신은 이를 허락할까. 웃음을 전하는 지능을 갖춘 로봇이, 즉 인조인간이 생물학적인 인간을 즐겁게 해 줄 수 있다면. 질병을 낫게 하고 행복감을 전하여 준다면.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울 만큼의 가치가 있을 것이리라.

며칠 전 글벗님들과 농원에서 작업을 한 적이 있다. 농원의 특성상 두 명의 여성분이 짝을 이뤄 고단한 작업을 하는데도 뭐가 그리 즐거운 지 까르르, 까르르. 좀처럼 식지 않는 웃음을 이어갔다. 좀 떨어진 곳에서 함께 작업하던 동료까지 웃게 만드는 묘한 바이러스를 가진 웃음이었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기 때문에 행복해 진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살짝만 건드려도 자지러지게 웃는 그녀에게 묘한 매력마저 느껴졌다. 참 좋은 자산을 가졌음에 틀림없다. 그녀가 가진 웃음 DNA를 인공지능으로 변환해서 내 곁에 두고 싶었다. 그러면 모든 질병이 치유되고 행복지수가 껑충 뛸 것
만 같았다.

기계와 인간이 겨루는 세기의 대결에 지구촌이 들썩이고 도처에서는 바둑바람이 일고 있단다. 인간에게 해롭지 않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면 바람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마냥 웃고 즐길 일만은 아니듯 싶어 한쪽 가슴이 시린 것은 나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인가.

(2016. 3. 30)

부드러운 화법

채근담菜根談에 ‘남의 잘못을 공격할 때는 너무 엄격하게 하지 말아서 그가 달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를 생각해야 한다.’ 는 공인지악무대엄攻人之惡毋大嚴이라는 구절이 있다. 잘못을 타이를 때는 물론이고 상대방에게 어떤 지시를 하거나 요청을 할 때에도 강요보다 권고 화법을 쓰는 것은 대화의 요령을 넘어 관계를 맺어가는 기술이다.

김굉필(1454~1500)은 조선의 손꼽히는 도학자다. 누가 꿩을 선물로 줘서 고향에 계신 어머니께 보낼려고 하녀에게 장독대에 널어 말리라고 했단다. 며칠 뒤 하녀가 겁먹은 표정으로 아뢰었다. ‘고양이가 다 물어갔습니다’. ‘뭐라고? 어머니께 보낼려고 했던 것을…’ 그는 크게 화를 내며 꾸짖었다. 이때 옆에서 지켜보던 제자 조광조(1482~1519)가 천천히 다가와 어머니에 대한 효성은 참으로 지극하시나, 고의가 아닌 하녀를 과격하게 나무라서는 안 될 듯합니다. 김굉필은 그의 손을 덥석 잡고 ‘나도 금방 뉘우치고 있었네. 내가 너에게 배워야겠구나’ 했다는 고사가 있다.

‘쥐도 도망갈 구멍을 보고 쫓으라’는 속담이 있다. 나는 여섯 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내 초등학교 오학년 때 돌아가시므로 다섯 동생들한테는 아버지 역할까지 해야 했다. 모두를 고등교육까지 시켜주고 시집장가 보내는 등 헌신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내 자식 셋을 뒀으니 언제나 어려운 생활 속에서 집사람의 내핍을 강요할 밖에 없었다. 사십여 년 직장생활을 마친 후 제2인생을 시작할 무렵 노후자금은 커녕 빚이 수억원에 달하게 된 것은 아우들의 빚보증 때문이었다. 공인지악무대엄이어늘 없는 돈 닦달 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여생을 형을 위해 살겠다는 다짐을 받았으니 유형의 부채보다는 무형의 채권이 더 많은 셈이다.

친구를 새기되 감언甘言보다는 고언苦言을 해 줄 수 있는 친구가 있어야 한다는 교육을 받아왔다. 가르침의 속뜻은 이해되지만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고언을 할 때는 상대방의 기분과 시기를 잘 봐서 해야 관계를 그르치지 않는다. 상대방이 고맙게 받아들이면 좋지만 ‘네 나 잘 하세요’ 하면 충고도 무용한 것이다.

가정에서의 자녀교육은 흔히 지시일변도일 때가 많다. 자녀를 올바로 훈육하기 위한다지만 실은 권유형의 대화가 훨씬 효과가 큰 줄로 알고 있다. ‘이걸 좀 해라!, 보다는 ’이걸 좀 해 줄 수 있을까?’ ‘잠 좀 그만 자고 일어나라!’ 보다는 ‘이제 일어날 시간 되지 않았니?’ 하는 부드러운 말씨가 설득력을 높인다. 꾸지람도 너무 엄격하게 하지 말듯이 지시도 부드럽게 해야 호응이 더 잘 된다.

부부싸움에서 이기는 쪽은 목소리 낮은 쪽이라는 우스개 얘기가 있다. 나의 아내는 큰소리 칠 줄 모른다. 아니 화나는 일이 있으면 말을 아예 않는다. 그럴 때면 나는 ‘현대인은 분위기 전환을 빨리해야 한다.’고 하면서 ‘어찌됐건 미안타’고 먼저 말한다. 엄격하고 과민한 것보다는 차분하고 부드러운 것이 강점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직장에서도 그렇다. 부하직원이 올린 결재서류를 사정없이 고쳐서 결재하는 상사보다는 ‘이 부분은 이렇게 고치면 어떨까?’ 하고 부하직원의 입장을 배려해 주는 상사가 존경받고 그런 분위기의 직장이 발전하게 마련이다. 이런 이치를 깨달은 건 퇴직에 가까운 후반부였으니 전반부에 함께했던 후배 직원들에게 미안함이 잊히질 않는다.
그 뿐인가 사회생활도 마찬가지다. 어쩌다 모임에 나와서 혼자만이 똑똑한 양 조직을 비판하고 불만만 쏟아 놓아서는 안 된다. 내 사견임을 전제하고 ‘이 부분은 이렇게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듯싶습니다.’ 하는 식으로 부드럽게 얘기해야 거부감이 생기지 않는다. 좋은 친구로, 지역의 리더로, 선배로 살아가기 위해서 무대엄毋*大嚴을 철칙으로 삼을 일이다.

* 毋: 없을 무無의 고자

모르면 배워야지

우리 경제의 80%가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그런지 당진에서는 경제교육을 접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기에 명강사를 불러 시민강좌를 개최했다. 그것은 당진문화원장으로서 문화원의 또 다른 역할이라는 생각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호응도가 낮았다. 그 넓은 강당에 참석자가 20여명에 불과했다. 토요일인데다가 저녁 여섯시는 식사시간이 아니던가. 그런 애매한 점도 있었거니와 이보다는 홍보가 부족했지 싶다.

강사는 ChFC(Charterd Financial Consaltant:종합자산관리사) 대표 강 철 선생이었다.

그의 강연에서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말이 많았다. 보통 사람들은 몸이 불편하면 의사를 찾고 소송이 필요하면 변호사를 찾는다. 자산관리를 잘 해서 돈을 모으려면 누구를 찾아야 하는가. 자산관리전문가를 찾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자산관리는 자라나는 학생도, 직장인도, 주부도, 노인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다음은 그 분의 강의 내용이다.

시대 자체가 호황기일 때에는 무엇을 해도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많았다. 경제성장기에는 부동산은 사기만 하면 오르고, 주식 역시 폭등하던 시기였기에 자신들이 재테크를 아주 잘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잘 해서가 아닌 시장이 좋았던 것뿐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 경제상황은 상당히 좋지 못하다. 무얼 해도 과거 같지 않고 손실만 보며 힘들고 지친다. 그런데 다들 과거에 내가 이렇게 이뤄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제대로 된 경제교육을 전해주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 평균 중, 고교생의 금융교육 시간은 3시간 미만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금융 후진국이란 소리를 듣는다. 과거 돈을 많이 벌었으나 관리를 하지 못하여 지금 은퇴를 하고도 은퇴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무엇 때문인지 알면서도 개선 할려는 노력을하지 않는다.

안정적이라는 것은 중요하나 때에 따라서 절대안정은 장기적으로 ‘독’이 될 수 있다. 매일 반복적인 삶에서 희망이 없음을 한탄하면서도 변화를 주지 않고 노력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다른 결과를 바란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어제와 똑같이 살면서 다른 내일을 기대하는 것은 정신병 초기 증세라고 아인슈타인은 말했다. 금융을 알아야 하고 금융에 대한 교육이 중요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금융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단 한 번도 부자가 될 수 없음을 받아 드려야 한다.”

그는 자산관리가 어떤 것인지 자산관리를 위해 준비해야 하는 과정은 무엇인지를 전문적으로 알기 쉽게 전달하였다. 금융기관에서 강사로 활동하고 여러 단체의 금융세미나를 진행하며 쌓아온 노하우로 보다 쉽고 재미있게 ‘종합자산관리’를 알려 주었다. 그리고 자산관리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란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준비가 중요하다. 자산 관리가 안 되는 가장 큰 이유는 큰돈을 모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자산관리를 통하여 준비를 잘 하는 사람은 하지 않는 사람 보다 풍요롭고 여유로운 삶을 접하실 수 있다고 하면서 그는 강의를 끝냈다.

우리네 인간은 경제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 문화도 경제가 수반되어야 한다. 인간은 이 세상을 하직하기까지 작든 크든 자산관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경제적 성패가 갈린다.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모르는 줄 알면서도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은 자신에 대한 직무유기다. 앞으로 문화원의 인문학 강좌에 뜻있는 시민들의 호응을 기대해 본다.

먹그림 전시회에 다녀와서

2015년 여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가 창궐하여 의심자가 자가 격리되는가하면 공중장소에 모이는 자체도 불안을 느끼는 사태가 몇 개월째다. 경기가 세월호 때보다도 더 나쁘게 되고 초기대응이 서툴러서 사태를 키웠다는 세간의 비평이 난무한다. 이를 의식한 정부가 서둘러 추가부양책을 쓰면서 경기 띄우기에 여념이 없다.

그동안 미루어왔던 전시 등 행사가 연달아 열리고 있다. 엊그제 먹그림전시회가 있으니 문화원장이 참석해 달라며 정행화 먹그림동호회 회장이 문화원을 찾았다가 내가 자리에 없으니까 전화를 해 와서 흔쾌히 허락한 터였다. 정행화 회장은 잘은 모르지만 내가 다민 선생님에게서 서예통신강좌를 받을 때 동향인으로 소개 받아 이름은 들어 알고 있었다. 내가 퇴임 후 당진에서 활동하면서 이런 저런 행사에서 만나곤 했던 인물이라서 사족을 달고 허락했던 터, 도록에 시장과 의장의 인사말만 들어 있으니 나는 참석만 하고 인사말은 없는 거로 하자고 했고, 지도강사인 김윤숙 작가로 부터 참석요청이 있기에 똑같은 조건으로 수락했었다.

10여명 밖에 안 되는 회원들이 그 넓은 전시장을 어떻게 채웠을까 의문이었다. 막상 참석해 보니 1인당 2~3점씩 붙여서 나름 벽공간은 엉성하나마 채워져 있었고 바닥에는 한지로 만들어 둥그렇게 연결한 커팅테이프를 놓아 전시장 분위기를 살리느라 애쓴 흔적이 보였다.

사회자의 어눌한 멘트가 이어졌고 내빈소개를 하는데 나는 시장을 대신한 부시장, 의장을 대신한 부의장 옆에 서 있었건만 모든 인사를 다 소개한 후에도 나는 소개가 없었다. 당황한 김윤숙 선생이 몇 번의 조언 후에 이름까지 써주고 나서야 소개를 하는 게 아닌가? 참으로 어이없고 불쾌했지만 그렇다고 감정을 내 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잠자코 있었는데 부시장, 부의장 다음으로 축사를 하란다. 좀 시간을 멈칫하다가 발언대로 나갔다. 형식이고 뭐고 다 잊은 나머지 인사를 않고 발언을 시작했으니 참석자들은 나의 무대매너를 체크했을 테고 이게 화제가 되어 뒤풀이 술상에 안주로 등장했으리라.

준비 없이 등단해서 나는 이렇게 몇 마디 했다.
“그동안 무더위도 잊은 채 정열을 작품에 녹여내신 작가여러분의 노고를 치하 드리며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작품지도에 수고를 아끼지 않으신 늘꿈 김윤숙 선생님께도 감사드립니다. 김홍장 시장님, 이재광 의장님께서 20여 년 전 문화원의 부원장, 사무국장을 역임하셨는데 이런 분들이 계시기에 오늘날 당진은 문화의 르네상스를 맞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런 문화예술의 진흥이 두 분만의 힘으로 되는 게 아니고 여기 오셔서 축하 해 주고 계시는 정병희 부시장님, 편명희 부의장님, 그리고 저 뒤에서 수고하시는 문화관광과 과장님, 팀장님 등 여러분이 계시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되어 감사를 드립니다. 먹그림은 채색을 하지 않고 먹으로만 그리는 그림, 또는 먹으로 테두리를 하고 그 안을 채색하는 그림 등으로 표현하지요? 먹의 농담이 채색과 더불어 나타내는 조형성이 은은하면서 작가분들의 고매한 성품을 담아낸 수작이 많다는 걸 느꼈습니다. 해학적인 표현입니다만 ‘補知면 早知요 自知면 晩知라’는말이 있습니다. 배우고자 할 때 도움을 받으면 일찍 알아지고 스스로 알고자 하면 늦게 알아진다는 뜻이지요! 전시회를 통해서 먹그림에 관심 있는 시민들이 회원으로 등록하게 하는 것도 전시회의 목적일 수 있을 것입니다. 모쪼록 먹그림의 저변 확대에 좋은 기회가 되길 바라며 여러분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축하합니다.“

이어서 다과회로 안내 되었지만 일정이 있어 먼저 간다는 부시장을 따라 전시장을 나섰다.
문화원장 자격으로 각종 행사에 초대되고 많이도 참석해 오고 있지만 의전이 맘에 안 들어 불쾌할 때가 더러 있다. 초청해 놓고 소개를 격에 맞지 않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봄 4. 4독립만세운동 기념식에서는 그림그리기 시상도 해야 하는 원장 소개를 빼 놓았다가 사회자가 나중에 좀 늦게 참석한 교육장과 함께 추가로 소개하더니 잠시 후 사무국장이 또 소개하는 촌극도 있었다. 시골행사 일수록 내빈소개시간이 길고 어중이 떠중이 다 소개하는 비효율을 문화원 차원에서 시정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나부터 안 되고 있으니 탓해 무엇하랴! 참석하기 전 사무국장으로 하여금 의전을 챙기도록 하면 되지만 원장이 너무 자리에 연연한다는 비평을 들을 수 있어 조심스럽다, 그렇다고 수수방관하면 기관의 위상이 떨어지게 될 것이고 차라리 어지간한 행사에는 참석하지 않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이 것 저 것 다 그만두고 토굴생활이나 하면 마음 편하겠는데 공연한 마음고생을 하고 있는 게다.

생활주변의 무수한 경우에서 언짢은 사소한 일들로부터 마음을 자유롭게 가지는 비법은 뭘까? 마음수양이 아직도 멀었음을 자책한다. 어디를 가던 작은 일에 대범한 생각으로 큰 틀에서 호시우보虎視牛步1)해야겠다. 연일 쓰는 붓글씨 사자성어인데 글씨 따로! 처신 따로! 이니 이 몸은 언제 선비가 될꼬

1) 호시우보: 호랑이 눈과 같이 예리하게 관찰하고 소걸음과 같이 우직하게 하라

김영란 법

독일에서 간호사 생활을 하다가 한국에 정착한 60대 부인이 고국에서 정 붙이고 살기가 의외로 어렵다는 하소연을 한 적이 있다. 팔 년 전 우리지역 군수가 독일을 방문하여 독일인 마을 건립을 약속했다고 한다. 노후를 고국에서 보낸다는 소박한 꿈을 안고 왔는데 사회적 정서가 맞지 않아 녹록지 않다는 얘기였다.

독일인들은 식사를 함께하자고 제의를 하면 당연히 각자 내는 줄 알고 답한단다. 자기 주머니에 현금이 있으면 오케이 하지만 돈이 없으면 이유를 들어 함께하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은 같이 가자고 한 사람이 모두의 밥값을 지불하니 다음에 나도 그렇게 하기가 영 부담스럽더라는 얘기였다. 더구나 현금이 없으면서 카드로 외상을 하는 모습은 실로 경악스럽기 까지 하더라는 얘기였다.

한 때 초등학생에게 방과 후 시간에 붓글씨를 가르친 적이 있다. 스승의 날 하루 전 한 학생으로부터 백화점 상품권이 든 봉투를 받았다. 그 학생의 어머니는 평소 치맛바람 날리는 분이 아니다. 다행이도 내 위치가 학생의 성적부에 점수를 매기는 자리가 아니어서 성의로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대학원생에게 지도교수는 생사여탈권을 쥔 왕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석사 박사를 하고 취업까지 하려면 그 고비마다 지도교수의 종이나 다름없는 헌신을 해야 하는 관습이 아직도 남아 있다. 직장인으로서 내가 석사과정을 할 때는 그런 줄도 모르는 청맹과니였다. 아무런 사례도 할 줄 몰랐는데도 그 교수님은 내색이 없으셨다. 오히려 내게 은퇴 기념논총의 제자題字를 써달라는 부탁을 하시면서 ‘사례금은 없네’ 라고 하셨다. 지금까지도 사제간의 돈의는 계속되고 있으니 우리에게 김영란 법은 거추장스런 장식품일 뿐이다.

내가 직장생활 초년기 때 그러니까 칠. 팔십 년대만 해도 상사와 회식을 하면 아랫사람이 윗분을 모시는 것을 당연시 했었다. 그러던 것이 윗사람이 내는 관행으로 바뀌더니 오늘에 와서는 밥을 살려면 아랫사람에게 물어서 허락을 받아야하고 사정해야 회식도 가능한 세상이 되어 버렸다. 공직사회도 많이 맑아지고 투명해져서 뇌물을 건네야 일처리가 원활하던 것도 옛이야기가 되었다.

김영란 법은 아랫사람보다도 윗사람에게, 하위직급보다도 고위직급에게, 서민보다도 부자에게 요구되는 규범이다. 농.특산물 생산자나 요식업자가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특혜와 편의를 매개로 한 기득권층의 결탁을 막기 위한 사회 진통이다. 하지만 법을 만들면서 정작 대상이 되어야 할 국회의원은 다 빼 놓았으니 정통성이나 있는 법인지 모르겠다.

사회 상규常規 등을 둘러싼 일부의 혼선을 놓고 실패한 법으로 몰아가려는 움직임은 올바르지 않다. 반 부패차원에서 전격 단행됐던 금융실명제도 당시에는 나라가 곧 결딴날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시간이 흐른 지금은 어떤가. 탈세 등 경제비리를 없애고 거래의 투명성을 높이는데 일등공신을 하고 있다. 유권자에 대한 향응제공을 금지한 공직선거법도 ‘선거운동을 원천적으로 막는 법’이라는 비판이 많았지만 결국 깨끗한 선거풍토가 자리 잡는데 기여하고 있지 않은가
2016년 9월 28일 마침내 김영란 법이 시행되었다. 이 법이 논의되기 시작한 2011년부터 그 대상을 누구로 할 것인지, 금품의 규모를 얼마로 할 것인지 논란이 무성했던 만큼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클 수밖에 없다. 과연 이 법이 사회를 경직되게 하고 일부에서 우려하는 바대로 경제를 크게 위축되게 될 것인지, 아니면 국민의 행복지수를 높여 선진국 진입을 앞당기는 지름길이 될 것인지는 예단하기 쉽지 않다.

독일인들의 더치페이가 지고지선은 아니라고 본다, 그 보다는 우리의 정情문화가 더 좋을 수도 있다. 사제 간에 주고받는 정 문화를 법의 잣대로 재단해서도 안 된다. 청탁이 금품의 수수로 이어지는 후진국행태를 벗고 건전한 상식이 지배하는 사회를 후세에 물려줘야 하는 책임하에 김영란 법이 있어야 한다. 사회상규를 벗어나는 경우만을 처벌의 대상으로 삼아 마땅한데 법은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인 경우를 많이도 보아온 터라 걱정을 놓을 수 없다.

(2016. 10. 6)

간이 맞아야

음식은 간이 맞아야 맛이 있다. 간간하고 달달해야 먹는 맛이 나는 건 나이 탓일까. 요즘 어느 식당엘 가던 음식이 싱거워서 소금을 찾는 일이 잦아졌다. 싱겁게 먹는 게 대세지만 맛을 포기하는 감내가 필요하다. 사람은 진솔하지 못하면 ‘싱거운 사람’이라는 평을 듣게 된다. 음식이던 사람이던 간이 맞아야 하지 않을까.

어느 날 아침잠에서 깨어보니 아내가 TV를 보고 있었다. 젊은 강사가 어느 마을의 회관에서 저 염식 요리를 강의하고 있었다. 최근의 의사들은 하나같이 짜지 않게 먹으란다. 요리사들도 무조건 저 염식을 권장하고 그것이 정답인 양 공영매체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한 참 동안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인터뷰에 응하는 아낙이 ‘건강에 좋다니까 이대로 해야겠네요’ 한다. 한국의 의사들이 국민건강을 해치고 있다는 생각이 일었다. 환자가 없으면 병원이 문을 닫게 되니 고객 창출을 위해서라도 허위의 사실을 진실로 오도하는 나라라는 생각은 나만의 오만일까. 약 십 년 전 사지를 헤맬 때가 생각났다.

PET시티 검사결과 흉선에 종양이 발견되어 단식을 해 보라는 주위의 권유로 십일 단식에 돌입했다. 소금물단식이었는데 소금을 먹지 못할 때까지 물과 함께 먹으라는 것이었다. 창안자였던 강선생은 그가 지은 ‘의사가 못 고치는 병 밥장사가 고친다’ 는 책의 서문에서 짜게 먹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대통령과 맞짱 토론을 주장하고 있었다.

강선생이 서울대 입구 역 주변에서 ‘장독대’라는 한식당을 운영할 때 찾아간 적이 있었다. 나와 아내는 간이 맞는데도 동석했던 아이들은 음식이 너무 짜다고 아우성이었다. 우리 전통식품인 된장, 고추장, 장아찌, 절인 음식 등이 다수였으며 아홉 번을 구웠다는 죽염을 주로 사용하고 있었다.

우리 몸의 약 팔 할이 물로 되어있고 염분이 줄면 면역력이 떨어져 건강을 해친다는 논리였다. 바닷물이 청정한 것도 염분 때문이며 우리 몸의 심장에 암이 없는 것은 심장이 염수로 채워져 있기 때문임을 역설했다. 물론 그 곳에서 사용하는 소금은 천일염을 볶아서 사용하고 있었다. 정제하여 나트륨덩어리인 소금은 적게 먹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와 같이 갯벌에서 생산해 내는 천일염은 나트륨은 적고 미네랄이 풍부해서 많이 먹어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세계 천일염의 표준으로 알려진 프랑스 소금 게랑드가 비싼 값에 팔리는 현실을 보면서 한 숨이 절로 난다. 바다를 막아 갯벌을 농지로 바꾼 정책이 지금에 와서는 무용한 일이 되었다. 오히려 간척지를 갯벌로 되돌리려는 역 간척사업이 논의되고 있는 걸 보면 위정자들의 근시안을 탓할 수밖에 없다.

십 일 간의 단식으로 몸무게를 십여 키로 줄였지만 종양은 어쩔 수 없이 수술에 의존해야만 했다. 단식후의 체중관리가 더 중요하다는 가르침을 명심하여 소식을 실천하고 있다. 감기를 달고 살아왔는데 단식프로그램에서 익힌 냉. 온욕으로 감기를 모르고 사는 것만도 감사한다.

떨어져 사는 아이들은 태안의 자염이나 함양의 죽염을 늘 가까이 하는 부모를 너무 짜게 먹는다고 걱정을 태산같이 한다. 이들에게는 현대의학정보와 부모의 확신 중 어느 편을 들어야 하는지 갈등이 심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렇게 짜게 먹는데도 우리 부부는 혈압이 정상임을 강변한다. 증조부께서는 식사 전에 간장을 한 숟가락을 잡수셨어도 건강하게 팔십을 넘겨 사셨다는 설명을 빼놓지 않는다.

간이 맞아야 하는 건 비단 음식뿐이 아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간이 맞아야 재미를 느끼게 된다. ‘만나면 무조건 좋은 사람’, 나도 모르게 그와는 간이 맞아서다. 나의 치부를 다 드러내어 얘기할 수 있고 상대는 이를 추임새를 넣어 격려해 주는 사이를 관포지교管鮑之交*라 하지 않던가. 형제보다도 이웃사촌이 낫다는 속담은 늘 가까이서 간을 맞춰 살기 때문이다.

음식이 간이 맞아야 맛이 있듯이 우리네 인간관계에서도 간이 맞아야 그 사이가 돈독하게 된다. 삶에 정작 필요한 것은 죽음이 세상을 갈라놓는 날까지 맺어진 사람들과 간 맞추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관포지교: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이 매우 사이좋게 교제하였다는 고사에 서 유래한 말로서 매우 다정하고 허물없는 교제를 이르는 말.

원고

공부의 신神 메모의 신

관직에 나서지 않고 죽은 사람을 제사지낼 때 학생부군學生府君이라고 한다. 죽어서 최고의 신분은 ‘생전에 깨우치려고 노력하다 간사람’인 것이다. 자기를 낮춰 소개할 때 학인學人이라고 하는 것도 천하지 않으면서 겸손의 맛이 나는 최고의 호칭이 된다. 노년을 하릴없이 이리저리 오가는 사람보다 고서古書를 읽고, 글씨를 배우고, 노래를 배우고… 무언가 배우려고 노력하는 노년이 중후重厚해 보인다. 그런데 인간은 늙어가면서 기억력 감퇴라는 생리현상과 부딪히게 된다. 따라서 메모를 효율적으로 하는 습관은 노화를 치유하
는 보약에 다름 아니다.
나는 농촌에서 태어나고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므로 낮에는 학교에 가고 저녁에는 일을 해야 하는 그야말로 거꾸로 주경야독晝耕夜讀의 중학교 시절을 보냈다. 십리十里나 되는 학교를 걸어서 오가는 길이 나의 유일한 자습시간이었다. 어머니가 낮에 보리를 베어 놓으
시면 나는 방과 후 지게로 져서 날라다 놓고 절구에 뚜들겨 떨었는데 까치발을 서야만 보릿단이 절구에 떨어지면서 낱알이 수확되었다. 밤이 이슥하도록 일을 하고 등굣길에 공부를 해야 했으니 아침밥을 늘 재촉하곤 했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를 유학 가서는 공부가 일보다 훨씬 쉬웠다. 일 학년 일 학기에 1,500여
명의 전교생 중에 최고의 점수로 우등상을 타고 홀로 일에 묻혀 사시는 어머니를 한시라도 바삐 보고 싶어 반은 완행버스로, 반은 걸어서 집에 당도하여 어머니에게 안겨 흐느낌으로 해후했던 기억은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다. 그 뿐인가, 통신대학강의는 심야에 방송이 되는데 초저녁잠이 많아 정규시간에 들을 수 없었다. 그 시간을 지켜서 녹음을 해 놓는 아내의 도움으로 학사과정을 졸업했고 승진고시를 준비하면서 규정집을 십독十讀을 했더니 동료들이 ‘공부의 신’이라는 별칭을 붙여주었다.

내 자식 삼남매가 어렸을 때에는 집에서 직장이 그리 멀진 않았지만 길을 걸으면서도 책을 읽는 습관은 여전했었다. 마을에 사는 어른들이 내 아이들에게 너의 아버지 어디 다니냐고 물으면서 거기서 무슨 일을 하신다니 하면 ‘공부해요’ 라고 했다는 말은 지금도 회자膾炙 된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가 다름 아니었다. 자식들이 한결같이 변변한 과외를 받은 바 없는데도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었던 것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던 아버지가 동인動因
이었음에랴.

내 나이 오십 때의 일이다. 귀한 손님과 점심약속을 해 놓고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전화가 걸려 와서야 기억이 되었고 현장에 도착해서 백배 사죄를 드렸지만 실수를 쓸어 담을 방법이 없었다. 당시는 스마트 폰이 없었고 일정표에 기록하는 게 유일한 방법이었는
데 메모를 하지 않은 것이 큰 실수의 원인이었다. 어찌된 일인지 나이 육십을 넘기면서
부터 우산을, 장갑을 놓고 다니고 약을 거르고 전화번호가 기억되지 않는다. 메모를 하지 않으면 상대방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여 낭패를 보기 일수다. 풀꽃의 작가 나태주 시인을 뵈면서 메모의 신으로 추앙하게 되었다. 마주하는 현상을 깨알 같이 기록하고 사진기에 담고 하는 데서 그리 유명한, 교과서에도 실리는 시의 시상이 떠오르는 모양이다.

서울대학교 법대를 나오시고 농협의 집행간부로 채용되셔서 내가 모셨던 김용구선배님도 메모의 신이셨다. 누구와 대화하더라도 메모를 하시므로 상대방에게서 성의와 신뢰와 존경을 받는 그런 분이셨다. 모 국회의원은 평소에 메모를 잘 하지 않는다. 머리가 좋아 그런가 보다 했는데 어떤 민원인에게 봉변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기억력이 좋아도 메모는 꼭 필요하고 그래야 실수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

‘새는 바가지’ 로는 세상 어디에도 발붙일 수 없다는 인터넷 검색어에 눈길이 머문다. 더구나 ’성공한 입사동기의 수첩에 메모의 비밀이 숨어있다‘ ’메모는 천재의 기억력보다 강하다‘ 고 한 ‘메모의신’의 저자 김영진에게는 특별한 게 있나 보다.
공부의 신 못지않게 메모의 신이 되어 보자! 노화의 동반자로 삼지 않으면 실없는 사람이란 소릴 들을테니…

(2016. 0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