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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율이시 棗栗梨枾

올 해 추석은 어느 해 보다도 풍성한 느낌이다. 이른 벼는 이미 수확해서 지대미로 유통이 되고 있고 사과 배 등 농산물이 풍부해서다. 서울서 오는 아이들이 시간되면 어련히 올라고 시간과 눈을 차가 올라오는 쪽에서 떼지 않으시는 어머니가 이제 팔학년 사반이니 다시 어린 애가 되시려나? 평상시 넉히 두 시간이면 당도하는 거리를 다섯 시간이 걸렸단다.

아이들에게는 제사지낼 때마다 가르치지만 제사상 진설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하기야 글로 써서 외우고 시험을 치러야 하는 교육에 익숙해 진데다가 일 년에 두 번씩 듣는 일로 외울 까닭은 없다. 아들이 주관하는 시대가 되면 제사를 모시기나 할런지 모를 일이지만 조율이시棗栗梨枾, 좌포우혜左脯友醯, 홍동백서紅東白西, 동두서미東頭西尾, 어동육서魚東肉西, 건좌습우乾左濕友, 반서갱동飯西羹東, 생동숙서生東熟西, 초동잔서醋東盞西… 나열하다 보면 어지간한 한문 실력이 아니고는 읽기조차 어렵다. 가가례家家禮라 하여 가문마다 예법의 적용이 다를 수 있다는 말로 위안을 삼아야겠다.

조율이시와 홍동백서는 둘 다 과일을 진설하는 방법이다. 조율이시는 서쪽이 상석이기에 서쪽부터 진설하는 것이고, 홍동백서는 붉은 색 과일은 동쪽에, 흰 색 과일은 서쪽에 놓으
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홍동백서와 조율이시는 진설하는 방법이 반대다. 이것은 조선시대 노론과 소론-남인에서 제사방식이 각기 다른데서 연유하고 있다. 노론은 홍동백서를, 소론-남인은 조율이시를 기본으로 하였다. 그래서 노론의 전통이 내려오는 충청도지역에서
는 홍동백서를, 소론-남인의 전통이 강한 경상도지역에서는 조율이시를 많이 쓰고 있다.

대추(棗)는 통씨여서 절개를 뜻하고 순수한 혈통과 후손의 번창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밤(栗)은 자신의 근본을 잊지 말라는 것과 자기와 조상의 영원한 연결을 상징한다. 밤은 한 송이에 씨앗이 세 톨이니 3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의미한다. 배(梨)는 속살이 하얀 것으로 우리의 백의민족에 빗대어 순수함과 밝음을 나타내 제물로 쓰인다. 배는 씨가 여섯 개여서 육조(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의 판서를 의미한다.
감(枾)은 열매가 열린 나무를 꺾어 보면 검은 심이 있는데 이는 부모가 자식을 낳아 키우
는데 그 만큼 속이 상하였다 하여 부모를 생각하여 놓는다고 한다. 감은 씨가 여덟 개여서 8방백, 8도 관찰사, 8도감사를 뜻한다. 이상과 같이 제사상의 주된 과일로 대추, 밤, 배, 감이 오르는 것은 이들이 상서로움, 희망, 위엄, 벼슬을 나타내는 전통적 과일이기 때문 이다.

예로부터 복숭아를 빼고 모든 과일은 올릴 수 있다고 한다. 고인이 생전에 좋아했던과일
이라면 어떤 과일인들 못 올릴까? 내 지역농협 조합장이 선물로 보내준 메론을 젯상에 올리면서 조상님께 고했다. 조상님의 음덕으로 호사를 누리고 있다고…, 고인이 좋아했다고 해서 담배를 불붙여 제사상 위에 올리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를 못하겠다. 담배 때문에 몇 년은 덜 살았을 터인데 이를 과일의 반열에 올린다는 건 동의할 수 없다.

홍동백서든 조율이시든 우리의 제사문화가 면면히 이어졌으면 좋겠다. 물론 가정의례 준칙에 바탕을 두고 형식보다는 실질적인 숭모의 사상에 뿌리 한 개선은 필요하다.
효 사상을 근본으로 하는 인성교육이 우리공동체를 유지 발전시키는 근본바탕이기 때문
이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국민으로 자녀를 키우는 일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효도는 부모와 조상을 받드는 일이 출발점이다.

2015. 9. 27 추석날 아침

인생 여행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시인이 만약 지금 이 시대를 살다 가더라도 여전히 유효한 표현일까? 국민연금증 카드를 받고 보니 새삼 지나온 날과 살아야 할 날의 경계에 선 기분이다. 어르신 교통카드라는 부제가 붙어 있어 서울을 가면 지하철이 무료다. 나는 경제활동을 하는 한 무료카드는 만들지 않겠다는 생각을 지녀왔는데 막상 올해로 65세가 되고 보니 그럴 필요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인의 연령이 65세에서 70세로 높아져야 한다는 일부의 주장에 박수를 보낸다. 기대여명이 너무 긴 때문이다. 예고가 됐던 일이지만 어느 덫 나도 노인의 대열에 합류했다. 연금공단의 권유가 원인이지만 연금증카드를 받는 기분은 이제 사회의 원로로서의 어르신 대우보다는 저 세상으로의 초대장에 다름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성공한 인생을 연령대별로 표현한 글이 의미심장하다. 10대는 ‘돈 많은 아버지를 뒀으면’, 20대는 ‘명문대학에 다니는 학생이면’, 30대는 ‘연봉 많은 대기업사원이면’, 40대는 ‘이차를 살 수 있으면’, 50대는 ‘공부 잘 하는 자녀가 있으면’, 60대는 ‘아직도 직장서 돈 벌면’이란다. 70대는 ‘병 없이 몸만 건강하면’, 80대는 ‘아직도 본처가 밥 차려주면’, 90대는 ‘전화 걸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100세는 ‘자고나서 아침에 눈 뜨면’ 이란다. 내 인생 전반부는 절반의 성공이랄까. 일중독으로 살았으니 지금 생각하면 내 아이들은 아버지가 저들을 위해서 한 일이 없다고 느낄 만도 하다. 자식위한 헌신의 가치가 그렇다면 모아 둔 재산 다 쓰고 갈 일이다.

고전에서 얘기하는 오복은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이었는데 언제부턴가 노인의 오복은 달리 회자膾炙된다. 건健(아무리 재물이 많아도 건강치 못하면 무용지물), 처妻(옆에서 돌봐주는 배우자가 있으면 행복), 재財(적당한 재산이 있어야), 사事(일이 있어야 나태하지 않고 생활의 리듬도 있다), 붕朋(나를 알아주는 친구가 있는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란다. 예나 지금이나 명예나 권력 따위는 없다. 많은 재산 상속도 없다. 사회로부터 용도폐기된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가 중요하다.

노인이 지갑을 열면 왠지 멋져 보이는 건 나만의 느낌은 아닐 게다. 서울에 사는 자식들한테 아파트를 사 주지 못한 걸 부담스러워 할 일이 아니다. 저들은 맞벌이에 자식을 많이 두지 않았고 부모봉양이 부담스럽지 않다면 얼마든지 부유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으니 그렇다.
노인이 재산 정리해서 스스로 양로원 또는 요양원을 들어가니 부모도 떳떳하고 자녀들도 부담일 수 없다.
70대까지는 건강을 유지해서 직장에 나가 돈 벌 수 있으면 좋겠다. 젊어서 억대 연봉자도 해 보았는데 이제 돈 쓸 일은 별로 없다. 직장은 돈이 목적이 아니라 건강유지가 목적이 된다. 80대에는 아내와 더불어 농장을 가꾸면서 취미를 고양시키는 일에 매진한다. 본처가 차려주는 밥을 먹을려면 무한봉사도 해야 한다. 가사일 분담하고 아내의 건강을 제일로 챙겨줘야 한다. 90부터는 시설에 입소해서 공동생활로 여명을 사회에 봉사한다. 동네 쓰레기라도 줍든가.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재능기부라도 해야 한다.

내 인생 여행을 마치는 그 날까지 성심성의를 다 할련다. 꾸준히 일하고, 붓글씨 쓰고, 수필 쓰고 여기 저기 모임에 회비 밀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 친구만나 내가 밥 사고, 젊은 사람 만나면 당연히 내가 사야 한다. 이 세상 머무를 시간이 별로 없는 사람의 순서가 맞다. 절반의 성공에 온전한 성공을 더하면 중간은 갈성싶다. 노후의 죽을 준비가 중요한 이유다. 유종인이 유종의 미를 거둬야지!

여보게, 밥 먹고 가시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55년 만에 묘표墓標를 세웠다. 진즉 세워드려야 도리인데 이제야 실천에 옮겼다. 그것은 내가 주변머리가 없는 점도 있지만 돌을 설치하면 안 되는 자리가 있다는 말을 들었기에 생각을 접고 지내온 점이 더 큰 이유다.

서瑞자 규圭자 되시는 우리아버지는 스물한 살에 장가들어 서른한 살에 작고했다. 헤아려 보니 어머니와 함께 한 기간이 10년에 불과하다. 5남 1녀 육남매를 남겨 놓으시고 홀연히 가셨으니 어머니한테서 포악한 욕을 들어도 할 말이 없으셨을 게다.

방 세 개짜리 농촌주택에서 증조할아버지 내외분과 종조부 내외분이 함께 사셨다고 한다. 증조할아버지는 사랑방을 쓰고 할머니는 안방을 차지하여 신혼부부가 할머니와 함께 지냈단다. 나를 낳으신 후 종조부 내외분이 분가를 했다지만 그런 상황에서 우리 6남매를 낳고 기른 어머니를 생각하면 기가 찰 노릇이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자에 밝으신 분이었다. 특용작물 재배에도 관심이 많아 박하, 모시 등을 재배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신지식농업인이랄까. 앞마당 주변에 복숭아, 자두, 포도 등 과일나무를 심어 우리형제들은 과일을 많이 먹고 자라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

당시는 가을에 벼를 수확하면 말려서 방아를 찧어 쌀로 보관했었다. 아버지는 통통 방아를 가지고 이 집 저 집을 다니며 작업을 하여 경제적으로 꽤 여유로웠다. 동네에서 유일하게 라디오가 우리 집에만 있었고 우리 집 굴뚝에서 연기가 나면 이웃집들도 따라서 밥을 지었다고 한다. 중절모자에 당고바지와 가죽 잠바를 입고 한양을 다녀오시는 날에는 동네 사람들이 한양소식을 듣는다고 우리 집 사랑방에 모여들던 광경이 생생하다. 정치적인 식견도 높으셨는지 윤보선, 장면, 신익희, 조병옥 같은 분들의 사진을 책상 앞에 붙여 놓고 묵상하실 때가 많았다. 종조부는 자유당 선거운동을 하셨으므로 숙질간에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일이다. 담임선생님과 함께 교장실에 불려갔다. 교장선생님은 나에게 어제저녁에 아버지가 몇 시에 들어오셨는지, 어머니와 무슨 얘기를 나누셨는지 캐물으셨다. 장성한 후 생각하니 갖은 수법을 동원하여 야당을 탄압하던 시대 상황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짧고 굵직하게 살다가 가신 아버지는 스물여덟 무렵 결핵을 얻어 세상을 버리셨다. 지금 같으면 병도 아닌데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신 것이다. 아버지는 허무하게 가셨지만 나에게는 평생을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내 삶 나침반 같은 것이다.
첫째는 아버지의 베품 정신이다. 우리 집은 길가에 있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길을 지나는 사람은 다 아버지의 손님인 양 들어와 쉬었다가 가라면서 호객(?)을 했다. 시도 때도 없이 밥을 차려 내오게 하므로 식구들 밥을 다시 하는 사례가 많았다면서 어머니는 지금도 불평을 하신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의 그런 베품의 덕량德量으로 후손들이 이만큼 사는 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둘째는 담력을 키워주신 점이다. 아버지가 편찮으실 때의 일이다. 새벽녘에 어린 나를 깨워 2킬로 정도 떨어진 약국에 보내셨다. 가는 길목에 공동묘지가 있어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뒤에서 귀신이 발길을 붙드는 것 같아 머릿결이 곤두서곤 했었다. 내가 무섭거나 싫은 내색을 하면 아버지한테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아 참고 다니다 보니 나를 누르는 힘이 저절로 길러진 것이다.
셋째는 아버지의 행보 하나하나는 내 삶의 정답 지와 같은 역할을 한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동리 우물물을 길어다 먹었다. 내 나이 다섯 살 땐가의 일이다. 아버지께서 삽을 들고 나가 파기 시작했다는 우물의 깊이가 열 길이나 되었다. 게다가 아무 기술도 없던 분이 석축石築을 쌓아 완성했다. 풍부한 물의 양과 시원함에 늘 감사하면서 아버지의 의지와 기술에 감복하며 자랐다. 나는 어려울 때마다 ‘아버지는 스물다섯에 저렇게 어려운 일도 하셨는데… ’ 하면서 나의 부족함을 채찍질하곤 했다.

건너 산의 음달에 계시는 산소를 따뜻한 곳으로 옮겨드려야 한다면서도 실행하지 못하는 내가 밉다, 그러나 우선은 표지석이라도 세워야 하겠기에 웅천에 계시는 향석 선생님과 상의했다. 조그마한 자연석에 ‘여보게! 밥먹고 가시게! 柳瑞圭 之墓’ 라고 새겼다.

저 세상에 가신지 반백년이 되는 아버지가 오늘따라 더욱 그립다.
아버지! 영면하세요!

어머니를 찾습니다

어머니의 연세는 올해 여든 넷 이시다. 가끔 하시는 말씀은
“왜 이런지 모르겠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병신이니 원”
그렇게 말씀하시면서도 무엇이든지 하지 못해 안달이시다. 표현하기에 그렇지만 약간의 디멘시어dementia증후군1)이 있는 것이 아닐까 늘 걱정이 된다.

저녁마다 다리 통증으로 잠을 못 이루시니 자식으로 늘 마음이 아프다. 수술, 보약처방, 건강보조기구 사용, 맛사지 등 정성을 다해 보지만 차도가 없으셨다. 그럴 즈음에 고명딸인 누이동생이 병원을 모시고 다녔다. 꾸준히 치료를 받으신 결과 큰 고통은 없어지신 것 같았다. 움직이기에 불편함이 없으시니 기세가 조금씩 등등해지셨다.

어느 날 바쁜 출근길이었다. 어머니께서 강아지와 토끼를 사러 간다며 먼저 차에 타고 계셨다. 한 쪽 손에는 어제 손수 작업한 강낭콩이 들려있었다. 당진 장 주변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막내아들에게 주려는 것이 확실했다.
“어머니! 오실 때 어쩌시려고 장터에 가신다고 하세요. 검정색 강아지를 주문해 놓았으니 며칠만 기다리시면 되는 데요”
라고 말씀 드렸는데도 막무가내셨다.
“내가 젊어서 한 두 번 다녀봤냐. 걱정마라”
오히려 귀찮게 잔소리 하지 말라는 어조셨다.

당진시장 주변에 내려드렸다. 어머니 혼자 가시게 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두 시간 정도 지나 동생한테 어머니께서 오셨는지 전화를 했다. 동생이 오히려 깜짝 놀란다. 동생이 시장주변을 다 살펴보았지만 어머니 행방이 묘연했다. 혹시나 해서 집에도 전화 해보았지만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장구경하실까. 장터에서 동네사람 만나 술 한 잔 나누시는 건 아닐까. 버스타고 오시다가 순성에서 아는 사람 만나 술 한 잔하시는 걸까. 여기 저기 수소문 해 봐도 찾을 길이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조바심은 더 욱 깊어졌다. 저녁 일곱 시부터 약속된 강의를 해야 되는 데 큰일이었다. 찾아 나설 수도 없는 시간이었다.

불길한 생각으로 파출소를 찾아갔다. 경찰관에게 자초지종을 진술하였다. 모든 정보망을 통하여 찾기에 최선을 다 해주었다. 그 때 한 경찰관이 하는 말
“가족이 적극적으로 찾으셔야지 경찰관은 보조자에 불과합니다.”
치매어르신을 잘 보살피지 못했다는 문책이며 훈계처럼 들려왔다. 그 때 오년 전 이 마을 사건이 갑자기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늦은 저녁 남편 산소에 들렸다가 논 수로에 빠져 삼일 만에 시체로 발견된 사건이었다.
“아이고 내 어머니 어찌 되셨으면…. 이 죄인을 어찌할 것인가”
당황스러웠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강의 시간 약속이 임박하여 자동차로 출발하려는 데 경찰관으로부터 파출소로 들어오라는 손짓이 섬광처럼 스쳤다. 들어서자마자 여순경이

“할머니 찾았습니다”.

담당경찰관이 어머니 실종사건 해결의 경과를 설명해 주었다. 당진장터에서 약 4km 정도 떨어진 면천소재 주유소 앞에서 홀로 계셨다고 했다. 한쪽 손에 지팡이를 짚으시고 다른 손에는 검정비닐을 들고 계신 할머니를 주유소 직원이 발견하여 신고하였다고 하였다. 사시는 곳을 물으니 ‘거문들’이라고 하셨단다. 주유소 직원이‘거문들’은 합덕 밖에 몰라 어머니가 안내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차로 이동하였는데 엉뚱하게도 예산군 봉산면 방향이었다고 했단다. 합덕이 아닌 거문들이 또 있는지 의심스러워 그 곳 치안센터를 찾게 되었다고 했다. 결국 신고 파출소에서 타전한 『SOS』 때문에 어머니를 다시 찾게 되었다. 강아지도, 토끼도, 막내아들 주려던 강낭콩도 까맣게 잊어버리셨던 것이 아니었을까. 아직 남아있는 기억을 살려내어 무작정 순성 집을 향해 오신다는 것이 면천으로 접어들어 걸으셨으리라.

“어머니 죄송합니다.”

얼마나 고생하셨을까. 땀은 얼마나 많이 흘리셨을까. 무척 배도 곺으셨을 터인 데, 성의 없고 무책임한 내 자신이 미웠다. 평소 어머니 진지 상을 잘 챙겨드렸던 아내에게 밖에 나가서 활동하라고 했던 나였다. 평소 아내가 집에 없을 때는 밥통에 있는 밥도 챙겨 드시지 아니하셨다. 그 이유를 이 못난 아들은 며느리 못나가게 억지를 부리신 것으로 의심했었다. 어머니의 치매를 모르고 지낸 내가 한없이 부끄럽고 죄송스러웠다.

다시금 파출소의 경찰관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이 들려오는 듯했다.
“할머니께서 그런 상태이신데 신상과 연락처가 적힌 목걸이를 채워드렸어야 하지요”
그 충언이 부끄러웠고 깊이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요양보호사고 사회복지사이면 무엇 한단 말인가. 이 세상 오직 한 분! 내 성공을 위해 불철주야 고생하신 사랑하는 어머니, 그 한 분도 제대로 돌보아 드리지 못하면서 남에게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한 없이 부끄러운 생각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거동이 불편하시거나 치매 걸리신 어르신이 계시면 요양보호사의 재가서비스나 생활시설로 모시고 가족들은 자기 할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어머니께서는 늘 그러셨다
“내가 왜 치매환자야.. 내가 아들이 없나, 왜 생으로 고려장 당하느냐“
라고 역정을 내신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불평하시는 어머니를 늙으셔서 그러시겠지. 핑계 아닌 핑계로 단정한 내 생각이 잘못이었다.

이번 사건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내 스스로 모실 수 있는 데 까지는 집에서 모시는 게 자식의 도리이다, 철저한 준비와 사랑이 가득한 관심으로 존귀한 나의 어머니를 정성껏 모셔야 되겠다. 나 자신도 점점 노인을 향하여 가고 있다. 아이들한테 짐이 되지 않는 그런 아버지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난 충분히 혼자서 생활 할 수 있어!’ 자만하고 고집 피다가 치매 증세가 찾아 와서 그런 저런 판단을 못하게 되면 나도 어머니 같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 아닌가. 이래도 문제, 저래도 문제, 인생은 고해라고 한 어느 철학자의 말이 틀리지 않는다. 백세 건강센터에 가서 어머니 신상표시 목걸이 하나를 당장 마련해야겠다.

2015. 7. 27

1)dementia는 『치매』라는 의학적 용어. 어원은 dement. 망령되다. 정신이 나갔다의 명사형

애마 다이어트

C와의 만남은 십이 년 전이다. 그를 선택할 때는 직장 퇴직을 사 년여 남겨놓은 시점이었다. 퇴직 후, 온 가족 여행을 다니려면 덩치 큰 애마 필요했고 또 C는 그 당시 인기도 있었다. 당시만 해도 애마의 여물인 경유 값이 휘발유 값 보다 상당히 저렴했고 서울에 사는 아이들을 보러 갈려면 고속도로 전용도로를 이용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당초 의도한 가족단위 여행은 단 한 번도 다녀보지 못하고 그러구러 12년의 세월이 흘렀다.
십 년 이상을 타다보니 고장이 잦았다. 잘 내달리다가도 어느 도로에 퍼질러 앉아 나 못가겠다고 떼를 쓸 것만 같았다. 게다가 십 년 이상 경과한 경유 차량은 서울 진입을 못하게 한단다.

지난해는 유달리 눈이 많이 내려서 언덕 아래에 차를 두고 걸어서 집에 드나드는 일이 빈번했다. 덩치만 크지 힘이 없어 눈만 오면 언덕길에서 지그재그로 미끄러지다가 결국은 후진해서 초입에 세워둘 수밖에 없었다. 나는 운동 삼아 걷는다지만 몸이 연로하신 어머니께는 여간 미안하지 않다. 그뿐인가. 운전석 옆 조수자리는 항상 아내의 자리였고 뒤쪽 오른쪽 좌석이 어머니 자리였다. 운전대와 뒷좌석에 열선이 깔리지 않아 겨울에는 운전이 불편했고 어머니께 항상 송구한 마음이었다. 핑계 삼아 애마를 다이어트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지 오래다.
삼천cc에 육박하는 C는 전륜 구동형이라 눈비에 한 없이 약하다는 단점 말고도 세금은 또 얼마나 부담스러운지 모른다. 구입당시 생계형 차량의 지위가 바뀌면서 일 년에 두 번 내는 자동차세가 무거웠다. 요즘 흔해빠진 후방카메라나 블랙박스도 없다보니 범퍼가 이리 저리 부딪쳐 험상궂기까지 했다. 이제 나이도 있고 하니 신차를 타야한다는 친구의 권유가 마음을 들뜨게 했다.

나이를 얘기하면 속절없이 약해지는 나의 약점을 친구가 건드린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내 생에 마지막일 자동차를 어떤 차량으로 바꿀까 며칠을 고민해야 했다. 우리나라에서 자동차는 신분이라는 얘기는 오래전부터 듣는 말이었지만 평생의 소신처럼 갖고 있던 의식을 버릴 수 없었다.

신혼 초 금반지를 손에 낀 모습을 본 전무님이 농협직원은 반지를 끼면 안 된다며 충고해 주셨기에 반지뿐만이 아니라 비싼 시계도 찬 일이 없다. 머리에 기름을 바르지 않았고 구두를 너무 깨끗이 하는 일도 삼가 해 왔다. 어느 직장보다도 월급을 많이 받았지만 가정형편상 여유가 없었기에 생활 그 자체는 검소하게 꾸려왔고 내 인생의 철학으로 확립되었다.

직장에서 가까운 자동차 매장을 찾았다. 작고 힘이 좋아 눈 위의 언덕길을 잘 오를 수 있는 차량을 찾자 딜러가 한 마디로 K 신형을 권했다. C가 불만은 있었지만 그래도 별 탈 없이 십이 년을 탔다. 그러니 아내에게도 정이 들었을 터 막상 애마를 바꾼다 생각하니 먼저 동의를 구해야 했다. 아내는 동의를 해 주면서 친구의 아들한테 구매해 달라는 조건을 붙였다. 언제 기회가 되면 도와주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자는 아내의 요청에 화답을 해야 했다.

이런 저런 장고 끝에 지난해 연말 C 폐차보상금을 받고 K 신형차로 바꾸게 되었다. 핸들과 앞 뒤 좌석에 열선이 깔려서 좋다. 어디를 가나 주차가 편리한데다가 사륜 구동형이다 보니 언덕을 불구하고 운행할 수 있어 좋다. 노구에 거동이 불편하신 어머니께 편리한 애마다. 이천구백을 이천이백으로 줄였더니 편리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체면은 좀 깎인 기분이지만 실사구시實事求是면 되지 않는가.

더욱 잘했다고 생각하는 건 흰색을 택한 점이다. 적어도 검정색이라야 품위가 있어 보였던 내 생각에 수정을 가하게 되었다. 그 동기는 구봉 송익필 선생을 숭앙해서 탄신제를 매년 지내오시는 윤재남 선생의 강의를 듣고부터다. 우리민족은 고래로 흰옷을 즐겨 입었으며 흰색은 잡신이 범접을 못한다는 가르침이었다. 나도 이제 나이에 걸맞게 마음을 밝게 가질 때라는 생각도 들어서였다. 내 마음의 어두운 부분이 있었다면 이제 밝고 투명하게 가꾸는데 애마의 도움이 필요하지 싶다

‘그랜저면 무엇하니, 터널 지날 때면 엔진이 꺼지는 걸’ 하며 우스갯소리 하던 지인의 목소리가 오버랩 된다. 덩치 크고 힘이 부족했던 애마를 덩치 작고 힘이 좋은 애마로 다이어트 하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차량이 신분이라는 사회적 편견에 신경 쓸 일도 아니다. 벌이가 넉넉지 않으면서 큰 차 탄다고 대수는 아니며 나이 들수록 운전이 편한 차가 우선되어야 한다. 내 좋다고 좋은 차 타고 농촌 길 나다니는 것도 나의 철학과 맞지 않는 일, 애마를 다이어트 한 기분이 쏠쏠하다.

(2016. 12. 20 )

신비의 4자 행운

곰곰이 생각하니 사람을 대신할 수 있는 숫자가 참 많다. 주민번호, 휴대전화번호, 자동차번호, 은행비밀번호, 이름을 풀이한 획수 등 생각 외로 많다. 모 신문사가 펴낸 책을 읽다보니 이런 문구가 눈에 띄었다. 사람을 나타내는 숫자 중 뒷자리 네 자리를 더하여 4, 9, 10, 12, 14, 19, 20, 22, 27, 28, 30, 36이 나오면 대흉大凶이라고 한다.

책의 저자도 알만한 지성인인데 어떤 과학적 근거보다는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얻은 결과인 듯싶다. 그래도 나는 이 말에 동의한다. 여러 해 동안 서예지도를 하다보면 호號가 없어서 내게 작명을 요구해 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아무 상식도 없는 주제에 남의 호를 잘 못 지어주면 오히려 폐해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평소부터 이 분야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나라마다 사람마다 선호하는 숫자와 싫어하는 숫자가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천天 지地 인人을 나타내는 3과 우주 만물을 이루는 오행(금金, 수水, 목木, 화火, 토土)인 5자를 좋아한다. 가마솥단지의 발은 2개가 아닌 3개이고, 기미독립선언서 민족대표는 33인이고, 음계도 ‘궁상각치우’ 라는 5음계를 사용한다. 서양 사람들은 7을 행운의 수라 부르고 음계도 ‘도레미파솔라시도’라는 7음계를 사용한다.
한자를 사용하는 나라는 대부분 4자를 싫어한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리라. 특히 중국, 홍콩은 죽을 사死자가 연상돼서 아파트에 4층이 없으며 자동차번호에도 4자는 쓰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의미가 우리나라에도 전해진 듯싶다. 아파트 또는 건물 4층을 F층으로 표현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는 동서남북 4방위,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지칭하는 4계절, 생년월일을 나타내는 4주柱와 팔다리를 일컫는 4지肢, 관혼상제의 4례四禮 등 중요한 숫자에 쓰인다.

고대 그리스의 피타고라스학파는 처음 네 개의 수인 1, 2, 3, 4를 더하면 10이 된다고 해서 4를 신의 계시인 신성한 수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들에게 4는 사물의 근본이나 중심이 되는 중요한 수였다. 세상은 점, 선, 면, 입체의 네 가지로 구성돼 있다고 하는 거나 물, 불, 흙, 공기의 4원소로 이루어졌다고 본 것은 4를 가장 조화로운 숫자로 보았던 때문일 것이다.

이런 숫자의 호好.불호不好를 떠나서 내가 겪은 4자는 너무나 신비롭게 느끼는 숫자다. 지난해 겪은 일련의 일들로 인해서 4자가 들어간 날은 혹시나 하는 기대를 걸어보는 날이 많아졌다. 2014년 4월 24일은 당진문화원의 제10대 원장을 선출하는 날이었다. 14시부터 시작되어 두 시간여에 걸친 투표에서 4표 차이로 상대방을 누르고 신승辛勝을 거두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불과 4일전에 집에서 기르고 있던 염소가 새끼 4마리를 낳은 일이 있었고, 1개월 전에는 내 작은 아들이 두 번째 아이로 손자를 안겨주었다. 큰아들의 두 딸을 통산하면 네 번째가 되니 4자행운의 연속인 셈이었다.

2004년에 있었던 일이다. 퇴임을 3년 앞두고 어머니가 계시는 현재의 주택으로 귀촌한다는 계획 하에 집수리를 시작했다. 외부정원의 조경을 어떻게 할까를 생각하다가 주변 분들의 의견을 들었다. 그 중에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한다면 어떤 이는 1솔, 2매조, 3사구라 등 12가지를 심으라고 알려주었다. 또 어떤 이는 붓글씨 쓰는 사람이니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매, 난, 국, 죽 4군자君子를 심으라고 하였다. 후자의 의견을 따랐던 일은 평생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어쩌면 습관인지 닭을 키우는 데도 수놈 한 마리에 암놈 세 마리를 키운다. 어머니가 심심할까봐 토끼를 두 마리 구입했는데 이웃집에서 마침 애완토끼 두 마리를 줘서 네 마리를 키우게 되었다. 오이를 심어도 한 이랑에 네 포기씩 심었으니 4자와는 질긴 인연인 듯싶다.

네 잎 클로버가크로버가 안정감을 주듯이, 자동차 바퀴가 네 개여서 안정감이 있듯이, 우리나라에 4계절이 있어서 자연의 혜택을 누리듯이, 내 사주에 4가 둘이나 들어 있어서, 친 손자 손녀가 넷이라서, 한문서예를 지도하면서 4자 성어를 가장 많이 접하고 있어서, 나에게 4자는 신비로울 수밖에 없다.

2015. 8. 5

승소, 그 후

이십여 년 전 부터 십여 년 간 종사宗事의 총무를 봤다. 윗대 어른들이 보신 회의록을 참고하려고 찾아보니 제대로 된 서류가 없었다. 종토에 터 잡아 사시던 당숙과 뜻을 함께 해서 회칙을 만들고 관향貫鄕을 다녀오는 등 일가들의 단합을 위해서 많은 일들을 했다.

종중재산의 소유자가 몇몇 일가 분들의 개인 명의로 되어 있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타계하시는 분들이 생기므로 종중명의로 등기를 변경할 것을 제안했다. 군청에 종중명의를 등록했다. 모든 재산은 종중명의로 등기하되 농지만은 농지기본법에 의해서 불가하므로 파별 대표자를 선임하여 등기할 요량이었다.

그동안에는 남성들로 종친회를 조직해서 운영해 왔는데 막상 일을 하려니 여성도 종친회원이 되어야 했다. 부랴부랴 회칙을 개정하고 전국에 흩어져 사는 일가들을 찾아 연락을 취했다. 취지를 설명했지만 흔쾌히 응해주는 일가는 절반에 불과했고, 인감증명을 첨부한 위임장을 받는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예 소송을 통해서 해결하는 방법이 낫겠다 싶어 진행했다. 아무렴 그동안 관행으로 해온 일에 반기를 들사람은 없을 거라는 생각은 순진하고 어수룩했다. 돌아가신 명의자의 반수에 해당하는 후손들이 자기 아버지의 재산이라는 주장이 이어졌다. 단합을 외치던 당숙과 그의 동생 당고모가 선두에 서서 반대했다. 그의 사촌들도 이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종중 일은 아무리 잘 해도 빛이 나지 않는다는 옛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다.

무엇 때문에 이 어려운 일을 내가 해 내야 하나. 소송이 시작되면서 총무직을 내려놓고 종중명의로 등록하는 일을 발 벗고 진행했다. 조상을 모신 임야가 종중이 아닌 개인 소유가 되는 불상사를 막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매달렸다. 그래야만 종친 간의 송사로 인해 조상께 진 빚을 다소나마 갚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토지조사부를 찾아오지 않는 한 승소 가 어렵다고 했다. 그 보관책임이 있는 시나 도에서도 나 몰라라 하니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윗대 어른들이 남겨놓은 자료를 일부 찾았지만 전부 한문으로 되어 있었다. 법조계의 변호 사나 판사세대는 한글세대라서 이를 한글로 토를 달아 제출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판사는 대체로 1년이 멀다하게 바뀌는 것도 판결이 늦어지는 이유였다. 첫 번째 신청은 증거 불충분으로 각하되었었고, 두 번째는 신청일로부터 삼 년여의 지루한 공방 끝에 승소판결을 받았다. 통산 9년이 걸린 셈이다.

종친회라는 명칭도 문제가 있었지만 종중으로 인정을 받았다. 미등기된 부동산은 종중소유임을 인정받았고, 농지는 종친회를 구성하고 있는 세파의 농지취득이 가능한 대표자로 등기하라는 요지의 판결문을 받았다. 그 순간 이 땅에 정의가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루한 재판과정을 몸으로 치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어렵게 살아가는 다수의 일가들은 종중재산임을 인정하며 반대 하지 않았다. 하물며 부자로 사는 일가가 자기 지분을 주장할 때는 서운함을 넘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산의 교환가치가 워낙 크다면 세태의 변화로 이해될 법도 하건만 그런 것도 못 되는 일에 사활을 거는 걸 보면서 인간 본연의 심성이 상실되고 있음을 느꼈다.

18대 국회에서 지역구 국회의원에게 전국의 종중재산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특별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발의를 부탁했었다. 법제처 심의결과 농지법을 고쳐야하는 조건에 부딪쳐 폐기되고 말았다. 한국사회의 유교사상 퇴조, 성 평등과 관련한 여성의 지위 향상, 가족법제도의 변천 등으로 종중활동과 조상숭배에 기초한 효 문화가 약화되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고기를 입에 문 개가 강물을 건너면서 다른 개가 더 큰 고기를 물고 있는 것을 발견하자 욕심이 생겨 이를 뺏으려다가 자기가 물고 있던 고기마져 강물에 빠뜨리고 마는 이솝우화에서 욕심은 화를 자초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제 앞으로 일은 종친회원 간에 화해와 신뢰의 다리를 놓는 일이다. 승자와 패자는 합당한 스스로의 책임을 다하고 상대에 대한 배려의 마음을 가져야한다. 그렇게 해서 화합하는 일만이 조상님들께 더 이상의 죄를 짓지 않는 일이 되는 것이다.

(2016. 10. 20)

변하는세상

김 선생! 더 늦기 전에 며느리들 불러서 선언 하세요. 이 아무개는 사돈들을 찾아가서 많은 재산을 자선단체에 기부나 하겠다고 했더니 딸만 둘이던 큰 며느리가 사십에 아들을 낳았다 잖아요?

6월의 첫 주 연휴가 시작되는 날, 전북대학교에서 열리는 구봉 송익필 선생 선양학술대회장에 가는 차안은 서로간의 인사와 자기주장들로 부산했다. 뜬금없이 재산 상속얘기가 나온건 알부자인 김 선생이 손자를 보지 못한 것을 걱정하면서였다. 차안에서는 열띤 대화가 이어졌고 두 시간의 이동거리가 짧게만 느껴졌다.

일행 중 어떤 이는 아들 며느리들을 모두 소환해서 너희들이 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으면 자신이 한 명을 더 낳겠다고 해 보란다. 그리고 그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강변을 한다. 공자 아버지가 후처를 얻어 칠십에 공자를 낳은 고사를 들이대며 묘안임을 강조한다.

이때다 싶어 나는 시대상황의 변천을 들어 딸들도 조상을 섬길테니 걱정할 것 없다고 주장했다. 가족법도 바뀌었고 장묘제도가 하루가 다르게 변화되고 있지 않은가. 아들만이 대를 잇는 전통의식도 변하고 있음을 강조했지만 아무도 동조하는 이가 없었다. 순간 나는 입을 굳게 다물었으나 은근히 내 걱정으로 부메랑 되고 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큰아들이 며느리 감을 데리고 왔을 때 셋을 낳을까요. 넷을 낳을까요. 묻던 때와 달리 두 딸을 낳고는 더 이상 못 낳겠다니 이를 어쩐 담. 작은 아들이 손자 하나를 안겨주었으니 천만 중 다행이나 전통적으로 지켜 오던 제사문화를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장자 상속원칙이 깨지고 여자에게도 똑 같은 지분을 상속하도록 한 제도며 산소를 관리하고 기제사忌祭祀, 명절제사名節祭祀, 등 봉제사奉祭祀는 어떻게 하도록 해야 하나. 물려 줄 재산이라도 많으면 이 또한 덜 걱정일 게다. 변변치 못한 재산을 어떻게 나눠주고 제삿밥 좀 얻어먹자고 해야 하나. 나보다도 선대 분들께 고告할 말이 마땅치 않다.

세상에 변치 않는 것은 없다. 우리의 제사문화도 바꿀 수밖에 없다. 기존에 산재해 있는 묘소를 공동묘지 또는 납골당으로 이전하는 방법이 있다. 이후의 장례는 화장장으로 지내고 제사는 종교단체에서 대행하도록 하면 될 듯 싶다.

내 집의 경우도 기제사 명절제사를 다 모시면서 절에서 행하는 백중기도百中祈禱(음력 7월 15일에 절에서 영가의 천도를 비는 의식)에 동참하고 있다. 이렇게 가정 제사를 절 예식으로 대체하면 될 일이다.

재산상속이 문제다. 재산을 자녀에게 물려주고 사회 환원은 극히 보기 드문 우리의 현실을 그 반대로 바꿔나가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후원을 기다리는 조직이나 단체는 널려 있다. 평생을 사회의 제도 속에서 살다가 가는 마당에 내가 빚을 진 분야가 있을 터, 그 곳에 아름다운 기부를 하고 저 세상으로 가는 기풍을 가꿔 나가야 한다.

김 선생님! 아들들도 모두 잘 사는 줄 알고 있습니다. 후학양성을 위해 평생을 바치셨는데 명절 때마다 찾아오는 제자는 몇 명이나 두셨나요? 돈이 없어 공부 못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등불을 밝혀주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전 재산을 장학 재단에 기부했다는 신선한 뉴스를 보여주세요. 이렇게 말하는 내 자신이 먼저 행하지 못하고 눈치를 살피는 것을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고 하던가요. 치매에 걸린 후 자식들 싸움시키기 전에 변호사를 먼저 찾아가는 슬기!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이 선택할 용기인가 봅니다.

변해도 너무 빨리 변했다. 손자 안겨드렸다고 어머님께 칭찬받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장례, 제사, 상속, 기부문화라는 단어가 공존하는 시대다. 수백 년을 지탱해온 부계중심의 가족제도 무너지는 소리가 선양회장에 가는 자동차 안에서도 요란하다. 이를 어쩌랴, 자연의 섭리로 받아들일 밖에.

(2016. 6. 4)

박물관 도시 타이페이

충남문화원연합회원 연수 차 대만을 다녀왔다. 평소 대만의 실상이 궁금하던 차에 잘된 일이었다, 출발 이틀 전 서해대교 주 탑 지지 선이 벼락을 맞아 끊어지면서 통행이 제한되었다. 그것이 뭐 그리 대수랴. 삽교천 구 도로로 우회하여 시간을 두 배 더 써서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2015년 12월 6일 오전 일곱 시 반이었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공항은 이미 여행객들로 들떠 있었다. 게다가 잘 정돈된 대기실, 검색대, 승강장, 무엇 하나 나무랄 데가 없는 세계적인 시설에 도취되어 11시 탑승시간까지 지루함을 느끼지 못했다.

대만 도원국제공항 까지는 한 시간 사십분 걸렸다. 수필집 한 권을 다 읽을 시간도 못되었다. 예전 같으면 신문지가 들려있던 내 손에 수필문학을 접하고부터는 어디를 가나 수필 책 한권은 꼭 대동을 한다. 짧은 글 속에서 진주를 캐듯 잠자던 뇌를 깨워 주고 읽기 편하여 즐긴다. 이렇게 짜릿한 기분을 느끼는 건 나만의 전유물은 아닐 게다.

처음 밟아보는 도원공항은 무척 깨끗했다. 온도는 우리나라 가을을 연상시킬 만큼 여행하는데 더 좋을 수 없었다. 하지만 누구의 시기가 깃들었던가. 4박5일 일정 내내 비가오거나 흐려서 대만 하늘의 햇볕은 따가운지 뜨뜻한지 알길 없다.

 

<대만 국립 고궁박물관, 용산사> 현지가이드의 안내로 여행 첫날의 투어버스에 올랐다. 대만의 면적은 우리 한반도 면적의 삼분의 일이지만 인구는 이천오백만 명으로 섬나라 중 인구밀집도가 세계 일위라고 한다. 아시아의 최고봉인 해발 4,000m인 녹산이 있는 대만에는 2,000m 이상인 산이 이백육십여개라 한다. 설명을 듣는 순간 섬에 온 기분이 아니라 얼마 전에 다녀 온 장가계가 떠올랐다.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 미국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러시아의 에르미타슈미술관과 함께 세계 사대 박물관으로 꼽히는 대만의 고궁박물관은 인파로 붐벼서 주마간산走馬看山격으로 훑어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약 칠십여 만 점의 소장품 중에서 육천오백여점만 전시하고 3~6개월 마다 교체하여 전시한다고 한다.
3층부터 올라가서 청대靑代의 보물 취옥백채翠玉白菜를 보았다. 흰색과 푸른색이 조화를 이룬 수정배추 위에 메뚜기와 여치를 새겨 넣어 자손의 번성을 기원하는 의미로 박물관의 대표작품이라고 한다. 옆의 육형석은 차가운 돌로 진짜 고깃덩어리 같이 보이게 표현한 예술미가 돋보였다. 2층에 전시한 왕희지의 글씨와 1층에 전시한 낭세령의 백준도는 서예술에 관심이 있는 나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다소 비싸지만 왕희지 글씨본을 사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 일정으로 타이페이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용산사를 찾았다. 1940년에 건립된 후 자연재해 또는 인공재해 등으로 몇 번 파괴되었다가 1957년에 재건했다고 한다. 흔히 동남아시아에서 그러듯이 도교, 불교, 그리고 다른 많은 신을 함께 모시는 사원이란다. 어둠이 깔리는 시간이었지만 화려했던 단청은 지금도 눈에 아른거린다.

 


<문예창의단지> 여행 둘째 날은 문예창의단지인 송산松山과 화산1914를 방문했다. 송산문화창의단지는 원래 담배공장이었지만 건물을 살려 문화지구로 꾸민 곳이다. 일제식민지시대 건물이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다. 나무복도는 당시 일제가 대만인의 근태를 파악하기 위한 용도로 지어졌다고 하며 당시의 소방시설은 지금도 사용한다는 가이드의 설명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나라처럼 일제의 식민지였지만 대만은 일본 지식층이 지배하면서 반일감정이 많지 않았다고 한다. 그 결과 지금까지도 건물들이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화산 1914단지는 1914년에 세워진 대만의 술 공장이다. 1999년 예술특구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문화예술단체나 개인에게 창작과 전시, 공연 등의 장소로 제공하고 있다. 도심 한복판에 위치하여 아티스트들의 예술창작 공간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우리나라 폐교를 문예창의단지로 활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101층 빌딩> 타이페이의 랜드마크인 101층 빌딩을 방문했다. 자랑스럽게도 우리나라 삼성물산이 공정률 70%를 투입하여 지진 8.5까지도 견딜 수 있도록 윈도댐퍼공법으로 지었다고 한다. 총 높이 508미터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빌딩의 중심을 잡아주는 600톤 무게의 원형 추가 상층부에 버티고 있는 점이었다. 그 밖에도 최상층까지 37초가 걸리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엘리베이터라고 하는데 일본 도시바제품이란다. 우리나라 잠실의 롯데월드몰이 123층이니 세계적인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스펀, 황금박물관, 지우펀> 여행 셋째 날은 스펀에서 소원을 담은 천등天燈을 날렸다. 비닐 천에 소원을 쓰고 불을 붙여 공중에 띄우는 일종의 열기구다. 우리나라에서도 연이나 풍선으로 하는데 대만까지 와서 이걸 해야 하나 생각했지만 철로변鐵路邊에서 호기심을 파는 대만의 관광 노하우를 보기위해 참여해 봤다.
아시아 최대였다는 금광에 차려진 황금박물관을 들러보았다. 보령의 탄광박물관과 유사한데 당시 광부들이 먹었다는 도시락 점심을 타기위해 줄을 섰다. 비를 맞으며 30여분을 기다리게 한 업주의 횡포에 우리 일행이 큰 소리로 항의하자 별채로 안내 받는 대우를 받은 건 이색적인 추억이 되었다.
다음으로 들른 관광지는 지우펀(기륭基隆)이다, 좁은 골목길에 끝없이 펼쳐진 상점들. 예쁜 홍등이 매력적이었다. 우리나라 드라마 온에어 촬영지로 유명하단다.

 

<야류 지질공원, 단수이> 여행 넷째 날은 국립야류해양공원을 탐방했다. 타이완 북쪽 해안 지롱의 서쪽에 위치하고 타이페이로 부터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다. 천백만 년 동안 침식 풍화작용으로 생긴 버섯바위, 촛대바위, 벌집바위, 생강바위, 호혈, 바둑판바위, 해식동굴, 화석, 여왕머리 등 기기묘묘한 형상의 자연경관에 탄식이 절로 났다. 중식은 익힌 회로 때우고(대만사람들은 회를 날로 먹지 않고 익혀먹는다고 함) 단수이로 이동했다. 페리를 타고 옛 거리를 지나 홍모성 관람을 끝으로 모든 일정을 마쳤다.

대만을 보면서 우리나라도 그에 못지않게 관광자원이 즐비하다는 생각이 든다. 가꾸고 머리 쓰면 세계적인 명소로 각광 받을 수 있는 자원이 얼마나 많은가. 거리를 가득 메운 오토바이 수리 점. 알고 보니 수리점이 아니라 시민의 주요한 교통수단이라니 그들만의 혜안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1938년 중일전쟁이 종료되고 국공내전이 시작되자 장개석장군이 대만으로 피신하면서 대량으로 반출한 유물들로 박물관 도시가 된 타이페이, 하나의 중국을 꿈꿨던 세력에서 독립을 표방하는 야당 천수이벤에게 권력이 이양된 후 중국경제개방의 수혜국이 대한민국으로 바뀌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현장에서 확인했다. 무상한 권력은 정치를 낳고, 정치는 국민을 지배한다. 미, 일, 중, 소 등 강대국의 세력 균형추 역할을 해내는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을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