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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가로 거듭나다 2

예로부터 사람을 평할 때 신언서판身言書判을 기준으로 했다. 내가 성장해서 직장생활을 할 때만 해도 글씨솜씨가 어느 정도 출세에 영향을 미쳤다. 글씨를 잘 써서 학력은 없어도 공직에 발탁된 경우가 많았고, 공무원은 도 단위 또는 중앙부서로 발탁되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나도 예외가 아니어서 근무지마다 동료들보다 초과근무를 더하곤 했는데 대전에서 근무하던 중 승진에서 탈락하면서 마음을 다스리는 수단으로 붓을 잡은 지 어언 30여년이 흘렀다.

내가 사용하는 아호雅號는 몇 개가 되지만 미석嵋石을 주로 쓰고, 자字는 성훈成勳이다. 1950년 충남 당진시 순성면 봉소리 1077번지에서 태어났다. 5월30일 태어나서 그해 6.25가 발발했으니 유년은 고달프게 성장했다. 순성초등학교, 면천중학교를 마치고 예산농고로 유학하였고 1969년 농협중앙회에 입사하여 2008년 퇴임했는데 현직에 있으면서 대전의 장암 이곤순 선생님, 서울의 다민 김홍석 선생님에게 사사했고 퇴임 후에는 웅천의 향석 전홍규 선생님에게 사사하여 일중 一中, 초정草丁계의 학풍을 따르고 있다.

한국미협, 대한서도협회 등의 공모전에서 입,특선하였고 서해미술대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아 초대작가가 되었다. 2010년 당진 문예의전당 대 전시실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고대주민자치센터, 순성주민자치센터 등에 출강하는 외에 2014년 당진문화원장에 취임하여 서예 무료 강좌를 개설 운영 하고 있고 고구려, 신라, 백제비 등의 연구와 우리글서체쓰기 과정을 문화원에 개설하는 등 서예발전에 일조를 하고 있다.

아울러 ㈜한국금석문각지예술연구소를 설립하여 명비보급에도 앞장서고 있는데 향석 선생님의 작품 활동을 돕기 위하여 회사를 설립했고 나는 대표를 맡고 있지만 보조자에 불과하다. 향석 선생님은 서울에서 수강생이 이백여명에 달하는 학원을 폐업하고 우리나라 오석을 세계에 알리겠다는 신념으로 웅천에 낙향하셔서 보령시 오석홍보대사를 역임하고 계신다. 광개토호태왕비廣開土好太王碑 연구에 있어 국내 최고권위자로서 실물크기의 비를 경기 구리시청 공원 등에 설치한 바 있으며 서울 양천구 비림공원, 경북 황간 비림공원을 조성한 바 있다. 당진지역에는 시청 광장에 세운 개청開廳 축시비祝詩碑, 왜목항에 세운 2천년 축시비, 삽교천에 세운 역대 대통령 글씨 통일염원탑統一念願塔 등이 연구소가 설치한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컴퓨터의 보급과 함께 악필惡筆인 사람도 글씨 못 쓰는 것이 흉이 아니고, 굳이 익히지 않아도 탓하지 않으니 서예학원이 밥 먹기 어려운 세상이지만 어느 행사장엘 가나 방명록에 글씨 잘 쓰는 것도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요 마음을 가라앉히고 성정性情을 기르는데 안성마춤이니 2018년부터 시행예정인 초.중.고등학교 국.한문 혼용 교육과 함께 국민적 관심과 참여가 필요하다.

결혼식에 혼서지를 써주는 일, 축의금에 축필을 함께 보내거나 주례사에 작품을 써서 넣어주는 일, 집짓는데 상량글씨를 써 주는 일, 연하글씨를 써서 보내는 일, 틈틈이 작품을 쓰는 일 등 생활 속에서 서예는 나의 일과가 되었다. 동호인 중에는 파킨슨병으로 오른팔을 떨지만 붓만 잡으면 떨림이 없다는 기이한 분이 계신다. 나 또한 붓만 잡으면 시간가는 줄 모르니 서예만큼 좋은 취미가 없지 싶다. 노년이 되어 친구가 없어도 나는 외롭지 않을 취미를 가진 것이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개인전 때 인사말로 인도의 교육자 케리여사의 어록을 인용했던 기억이 새롭다.

‘현대인에게 있어 세 가지 과오가 있다면 첫째는 모르면서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알면서 가르치지 않는 것이요, 셋째는 할 수 있으면서 하지 않는 것이다’ 라고 했는데 내가 조금 아는 예술을 가르치는 일로 현대인의 과오를 범하지 않고자 한다. 농촌실정에도 맞고 직장인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 주로 야간강좌를 열고 있는데 주경야독晝耕夜讀하는 학우들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느낀다.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교육, 현대서예의 흐름에 따르는 교육, 현대인에게 필요한 생활서예, 법첩만을 써대는 학습에서 국한문을 혼용하는 우리서체 학습으로 세예교육의 틀을 잡아나갈 생각이다.

조선 성리학의 대가이며 이이 이율곡, 우계 성혼과 상호 교류하였던 구봉 송익필선생이 어지러웠던 정국을 피해 우리 당진에 낙향하여 후학을 가르치는 일에 몰두하셨던 위업을 기리고 학문적 정신을 추념하는 서예대전을 만들어 역동하는 당진을 전국에 알리는 일을 하고자 한다. 지난 11월 11일 제 416주년 제향과 추념식을 거행 했던 바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할 일이다.

*약 3천년 전 은나라 성탕(成湯)의 반명(盤銘:세숫대야에 새겨진 글씨)에 쓰여진 글 苟日新日, 日新又日新(구일신일, 일신우일신: 진실로 날로 새롭고 날마다 새로워지며 또 날로 새로워야 한다)

 

서예가로 거듭나다 1

대전에서 근무하던 중 승진에서 탈락했다. 마음을 다스리는 수단으로 붓을 잡은 지 어언 30년이 흘렀다.

나는 1950년 6. 25가 발발하기 직전에 태어나 유년을 고달프게 성장했다. 순성초등학교, 면천중학교를 마치고 예산농고로 유학하였다. 1969년 농협중앙회에 입사하여 근무하던 중 대전의 장암 이곤순 선생님, 서울의 다민 김홍석 선생님에게 서예를 사사 받았다. 2008년 퇴임 후에는 웅천의 향석 전홍규 선생님에게 사사하여 일중 一中, 초정草丁계의 학풍을 따르고 있다. 내가 사용하는 아호雅號는 몇 개가 되지만 미석嵋石을 주로 쓰고, 자字는 성훈成勳이다.

한국미협, 대한서도협회 등의 공모전에서 입,특선하였다. 서해미술대전과 서도협회에서 초대작가도 되었다. 2010년 당진 문예의전당 대 전시실에서 개인전도 열었다. 지금은 고대주민자치센터, 순성주민자치센터 등에 출강한다. 그 외에 2014년 당진문화원장에 취임하여 서예 무료 강좌를 개설 운영하고 있다. 또 고구려, 신라, 백제비 등의 연구와 우리글 서체쓰기 과정을 문화원에 개설하는 등 서예발전에 일조를 하고 있다.

㈜한국금석문각지예술연구소를 설립하여 명비보급에도 앞장서고 있는데 향석 선생님의 작품 활동을 돕기 위하여 회사를 설립했다. 나는 대표를 맡고 있지만 보조자에 불과하다. 향석 선생님은 서울에서 서예학원을 하셨다. 수강생이 이백여 명에 달하는데도 폐업을 하고 우리나라 오석을 세계에 알리겠다는 신념으로 웅천에 낙향하셨다. 현재 보령시 오석홍보대사를 역임하고 계신다. 광개토호태왕비廣開土好太王碑1) 연구에 있어 국내 최고권위자로서 실물크기의 비를 경기 구리시청 공원 등에 설치한 바 있다. 서울 양천구 비림공원, 경북 황간 비림공원도 조성하셨다. 당진지역에는 시청 광장에 세운 개청開廳 축시비祝詩碑, 왜목항에 세운 2천년 축시비, 삽교천에 세운 역대 대통령 글씨 통일염원탑統一念願塔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컴퓨터의 보급과 함께 악필惡筆인 것도 흉이 아니고, 굳이 익히지 않아도 탓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니 서예학원이 밥 먹기 어렵다. 하지만 어느 행사장에 가나 방명록에 글씨 잘 쓰는 것도 읽는 이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요. 마음을 가라앉히고 성정性情을 기르는데 안성맞춤이다. 2018년부터 시행예정인 초.중.고등학교 국.한문 혼용 교육과 함께 국민적 관심과 참여가 필요하다.

결혼식에 혼서지를 써주는 일, 축의금에 축필을 함께 보내거나 주례사에 작품을 써서 넣어주는 일, 집짓는데 상량글씨를 써 주는 일, 연하글씨를 써서 보내는 일, 틈틈이 작품을 쓰는 일 등 생활 속에서 서예는 나의 일과가 되었다. 동호인 중에는 파킨슨병으로 오른팔을 떨지만 붓만 잡으면 떨림이 없다는 기이한 분이 계신다. 나 또한 붓만 잡으면 시간가는 줄 모르니 서예만큼 좋은 취미가 없지 싶다. 노년이 되어 친구가 없어도 나는 외롭지 않을 취미를 가진 것이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개인전 때 인사말로 인도의 교육자 케리 여사의 어록을 인용했던 기억이 새롭다. ‘현대인에게 있어 세 가지 과오가 있다면 첫째는 모르면서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알면서 가르치지 않는 것이며. 셋째는 할 수 있으면서 하지 않는 것이다’ 라고 했다. 조금 아는 예술이지만 가르치지 않는 과오를 범하지 않고자 함이다. 농촌실정에도 맞고 직장인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 주로 야간강좌를 열고 있다. 주경야독晝耕夜讀하는 학우들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느낀다.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교육, 현대서예의 흐름에 따르는 교육, 현대인에게 필요한 생활서예, 법첩만을 써대는 학습에서 국한문을 혼용하는 우리서체 학습으로 세예교육의 틀을 잡아나갈 생각이다. 400여년 전 조선 성리학의 대가인 구봉 송익필 선생이 어지러웠던 정국을 피해 우리 당진에 낙향하셔서 후학을 가르치는 일에 몰두하셨다 한다. 그분의 위업을 기리고 학문적 정신을 추념하는 서예대전을 만들어 역동하는 당진을 전국에 알리리라.

1) 광개토호태왕비: 중국 집안에 세워진 고구려 19대왕 ‘광개토대왕비’다. 18세에 왕위에 오르고 39년의 짧은 생을 살았지만 국강상지역 넓은 영토를 개척하시고 나라를 평안하게 하셨던 자랑스런 큰 임금이라는 뜻으로 20대 장수왕이 세웠다. 정식명칭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이다

벽난로 구들방

2002년 세계 꽃박람회가 태안군 안면도에서 열렸다. 그곳이 적합지였던 이유는 해양성의 서늘한 기후 덕이다. 꽃은 따뜻한 내륙보다는 해양성 기후에서 열흘은 더 산다고 한다. 문득 사람도 서늘한 곳에 살면 더 오래 살까 궁금해진다.

‘몸이 따뜻해야 암이 덜 생긴다’,‘아침에 냉수를 마시면 장에 좋다’, ‘아침에 찬물을 마시면 장이 놀래서 스트레스가 된다.’ 뭐가 옳은 말인지 헷갈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겨울에는 따끈한 온돌에 몸을 지졌으면 하는 게 많은 사람들의 바람이다. 요즘은 기름 값이나 전기료가 계속 올라 따뜻하게 한겨울을 나는 것이 부담스럽다. 올해는 평소에 준비해 두었던 방장을 놓아 구들방을 하나 준비할 요량이었다.‘

2014년 사월 어느 날 순성면 반딧불이도서관에서 우연히 이화종님의 ‘벽난로 구들방’이라는 책을 보았다. 호기심이 이는 치기를 달래며 집에 와 훑어보니 바로 이거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실에서 불을 때면 벽난로를 통하여 실내공기를 덥히고 화기가 구들을 덥혀 온돌의 효과를 보게 되는 방식이다. 다음날 강원도 화천에 사는 작가와 전화통화를 하여 수강생을 모은다면 강의를 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바쁘긴 하지만 그렇게 하겠다는 답변이었다. 잔뜩 고무된 나는 다음 날 당진시청 평생교육센터를 노크했다. 나의 설명을 들은 담당자는 윗분들과 상의해서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며칠 후의 답변은 수강생만 모아진다면 예산지원은 얼마든지 하겠다는 답변이었다. 그 후 신성대학이 구 군청자리에 설치한 평생교육원에 위탁하여 수강생을 모집하겠다는 전갈이 왔다. 모집 광고를 내자 당진 뿐 아니라 서울, 청주 등지에서도 신청자가 쇄도했다. 그 바람에 시당국은 육십여 명의 신청자를 삼십 명으로 줄이느라 애를 먹었다고 한다.

교육은 예산으로 하지만 실습은 수요자부담이라는데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다기에 내 집을 실습장소로 제공했다. 약 삼일간의 작업 끝에 이중 구들이 완성되었고 벽체와 창호 지붕 등 집을 완성하는데 까지 이십여 일이 걸렸다. 소요비용은 여섯 평 건축에 육백여 만원 들었다. 그 덕분에 지난겨울은 그야말로 아주 따뜻하게 지낼 수 있었다. 장작 5~6개비로 따끈한 구들에 몸을 녹일 수 있었다면 믿기지 않을 것이다. 100% 연소가 되어 재를 한 달에 한 번 치운다면 이 또한 놀랄 일이 아니겠는가. 또한 연기가 하나도 나지 않는 것이 너무나 신기할 따름이다. 도시가스 혜택을 보지 못하는 농촌의 난방문제는 이거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 누구에게나 자신 있게 권하고 싶다.

그 행사의 강의를 맡았던 이화종 선생님은 장애아들에게 구들방을 지어주면서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다고 한다. 내가 아는 상식을 여러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 책을 쓰게 되었다고 소개하면서 소탈하게 수강생들과 작업하던 그의 모습에서 진정한 인간의 순수성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떠한 격식도 필요 없고 다만 흘리는 땀방울이 내게는 향기롭게만 보이던 사람, 나는 그분을 통해서 참다운 인간의 단면을 보았다.

한겨울 추위에 언 몸을 온돌방에 누이는 순간 느껴지는 희열은 누구나가 가질 수 없는 그 어떤 행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든 살을 넘기신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온돌문화에 대하여 문화원장으로서 할 말이 생겼다. 그때 수강생 삼십 명 앞에서 한 인사말이 떠오른다.

“여러분 수고 많으셨습니다. 앞으로 1개월을 불 때보고 만족하면 여러분을 초청해서 하우스콘서트를 열겠습니다.”

이제 잔치를 준비 해야겠다.

종(鐘)

내 이름 첫 자는 쇠북종鐘자이다. 선친께서 일러주신 글자였는데 호적상의 한자는 술잔종鍾자로 되어 있다. 어려서는 관심도 없었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이름자에 술잔종자를 쓸 리 없지’ 하면서 의문을 갖다가 두자가 통용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정부에 등록한 한자와 다른 쇠북종자를 고집스레 쓰고 있다.

어렸을 적 이름자에 종자가 들어가는데다가 머리가 크대서 ‘종대가리’ 로 놀림을 받아왔다. 학생모자가 맞는 게 없어서 뒤를 타야 했고 지금도 향교에서 제례복을 입을라치면 두건이 작아서 뒤를 터서 쓰곤 하니 별명도 그럴싸했지 싶다. 하지만 손자 녀석도 머리가 큰 건 집안의 내력이면서 머리가 크니 하드용량(?)이 클 뿐 불만일 것은 없다.

초등학생 때 정오만 되면 교회에서 들려왔던 종소리는 지금도 귓전을 맴돈다. 일하다가도 교회로 달려와 정확한 시간에 종을 울렸던 종지기 신 집사는 무슨 생각을 종소리에 실어 보냈을까. 수업 끝을 알리던 학교 종은 왜 그리도 더디게 울렸던가. 개발 년대를 대표했던 새마을 운동은 새벽종이 아니었다면 무엇이 그 역할을 했을까. 새벽녘 천지를 깨우는 산사의 은은한 종소리는 잠 없는 늙은이들을 얼마나 뒤척이게 했던가.

천안에 근무할 때 인근 진천에 있는 종 박물관을 찾은 적이 있었다. 원광식 선생이 평생을 수집하거나 제작한 종 150여점을 기증해서 세우게 된 국내 최초의 박물관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상원사종과 가장 큰 종인 성덕대왕신종이 1.5분의 1로 축소된 범종을 전시하고 있었다. 종소리만 들어도 모든 중생의 번뇌가 없어지고 지혜가 자라나며 지옥에서 벗어나 삼계에 윤회하는 일도 없이 성불할 수 있다는 범종소리가 은은히 들리는 듯 했다

지난해 10월 어느 날 태안반도를 찾았다. 일행이 찾은 청산수목원은 저녁노을과 함께 2002년 세계 꽃 박람회의 추억을 회상하게 했다. 충청남도가 세계원예생산자협회와 함께 했던 행사에 관람객 100만 명을 동원하는 대 성공을 이루었다. 농협중앙회 일선책임자로 기여했던 추억이 아련했다. 그림정원에 들어서자 마주치는 대형그림에서 종소리가 울리는 듯 했다. 밀레가 만종을 그리면서 농부가 일손을 멈추고 기도를 하게 만든 동기는 멀리서 들려온 종소리임에랴.

국가의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보신각종은 서울시민의 뇌리에 꽈리를 틀어 앉은 지 오래다. 지방자치단체들도 나름의 종각을 지어서 중요행사에 등장을 시킨다. 천안에 근무할 때 천안시민의 종 건립에 일조를 하고 그 다음해 1월 1일 새벽 타종행사에 참여한 기억이 새롭다.

내 집엔 울타리가 없다. 사방에 나무가 심어져 있고 외딴집이라서 사람 발길이 드물다. 더구나 언덕이다 보니 동리사람들이 마을 오는 일도 없다. 하지만 누가 밖에 와서 찾아도 안에서는 잘 들리지 않는 문제가 있었다. 지난해 한 여름 동리 구멍가게에서 지인들과 맥주로 더위를 식혀가면서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동석했던 0사장이 며칠 후 내게 종을 들고 왔다. 별채에 달아서 외지인이 방문했음을 알리고 혹여 액운이 따라왔으면 달아나라는 용도로 치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인삼농사를 짓는 0사장이 종을 취급하는 친구가 있어 얻어왔다는데 나에겐 요긴한 선물이면서 받기만 해서야 되겠나 하는 생각이 부담이다.

최근에 내 집 옆으로 집을 짓고 이사 온 이웃이 젊은 부부라서 이른 아침엔 종을 칠 수 없다. 내 좋다고 남의 곤한 잠을 깨울 수는 없는 일이다. 때로는 정자에 앉아 있다가 손님이 오면 종 한 번 치고, 돌아가면 두 번을 치고… 손님이 오고 간 것을 안사람이 알아서 차를 내오고 가져가니 여간 신통하지 않다.

종을 선물해 준 0사장의 인삼농사가 풍년들라는 마음을 담아 세 번을 친다. 주변의 액운을 물러가라고 여덟 번(백팔번뇌를 생각하며)을 친다. 어지러운 시국이 안정을 찾기 바라는 마음으로 서른세 번을 친다. 자칫 흩어진 정신을 한데 모으는데 종소리만한 최음제가 없다. 종대가리님(?)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마을사람들이 행복해지면 좋겠다.

(2016. 11. 10)

역사교과서 국정화 國定化 뒤로 미루자

2015년 10월 27일 박근혜대통령은 국회 시정연설을 했다. 내년도 국가 살림살이를 설명하고 국회의 협조를 당부하는 대통령으로서의 행보다. 지나온 임기동안 늘 그랬으니 국민적인 지지를 받을 만하다. 임기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국정운영의 핵심과제로 노동, 공공, 교육, 금융의 4대개혁을 제시했던 차에 특별히 목소리를 높이거나 상기된 표정은 없었다. 그런데 ‘역사교육의 정상화’를 언급하면서 표정이 싸늘하게 바뀌었다. 야당과 국민을 비난과 설득의 대상으로 여기는 연설의 지속이었다. 대통령이 나서서 국론을 분열해놓고 4대개혁이 가능할까.

우리의 역사를 바로잡아 국민적 정체성을 확보하자는 의도였다면 국민통합과 화해를 겨냥했어야 했다. 4대 개혁과제도 임기 내 성과를 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교과서의 국정화에 대통령이 직접 나서고 청와대가 진두지휘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국회의원 선거구 획정 규율도 정하지 못했다. 보수와 진보, 야당과 여당을 극단으로 몰아넣고 시민사회를 양분하여 무엇을 얻고자하는 걸까.

최소한 여섯 가지 관점에서 대통령이 보이는 최근의 행보는 패착이 아닐 수 없다.

첫째는 국정화의 의도가 불순하다.

박정희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지우기 위함이고 이승만 대통령을 건국의 아버지로 각인하는 일이라면 박근혜대통령이 할 일이 아니다. 배나무 밑에서 갓끈 고쳐 쓰지 말고 참외밭에서 운동화 끈 다시 매지 말라는 속담도 모르나. 훤한 속내를 다른 맹랑한 주장으로 감추려 들어서는 안 된다. 고대사와 현대사로 구분하여 중국의 동북공정 등 동북아 역사 왜곡을 바로잡겠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1978년부터 3년간 역사전쟁을 치루지 않았던가. 일제 하수인 노릇을 했던 이병도 계열의 식민사학과 재야 사학자들 간의 전쟁에 다시 불을 붙이자는 것인가. 민도가 높아졌음을 알아야 한다.

둘째는 국정화만이 역사교육을 정상화하는 길이라는 생각은 큰 오산이다.

검인정체제를 보완하면 될 일이다. 그동안 검인정체제였기 때문에 교과서 표기에 좌편향이 많았다면 교육부가 검인정과정을 통해서 수정했어야 한다. 앞으로 국민적인 합의를 통해서 고쳐나가면 될 일이다. 자기얼굴에 누워서 침 뱉는 꼴이 아니고 무엇인가.

셋째는 획일적 사고보다는 다양한 사고를 해야 한다.

고령층 대다수는 정부여당의 주장에 무비판적으로 동조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만난 분 중에 교육계에 헌신하신 분인데도 불구하고 정부여당이 추진하는 것은 따라야 한다는 분이 있다. 역사를 사실대로 표기하고 왜곡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데 대해서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 가지 사안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을 획일화 하자는데 동조할 수 없다. ‘균형 잡힌 역사인식’과 특정정파가 주장하는 ‘올바른 역사인식’은 분명히 다르다

넷째는 학생들은 우리의 미래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초.중,고교 교육에서 우 편향으로 단일교육 받다가 대학에 가서 다양한 해석과 조우했을 때 젊은 세대들이 받을 충격을 생각해야 한다. 단답형이나 사지선다형에 익숙한 학생들은 다양한 사고를 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았다. 이렇듯 다양한 해석과 추론이 가능한 역사교육을 국정화로 획일화하자고 들면 학생들에게 경직된 사고를 심어주는 우를 범할 것이다.

다섯째는 모든 일을 밀실에서 또는 조급하게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

공개적으로 투명하게 국민의 의견을 수렴해야한다. 청와대가 지침을 주고는 교육부가 한 일이라고 발뺌하는 것이야말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일임을 각성해야 한다.

여섯째는 현재의 교과서가 좌편향이라는 집권층의 견해에 동의 할 수 없다.

좌편향, 우편향 보다는 긍정적 인식과 부정적 인식으로 해석해야 옳다. 현행 역사교과서에 잘못된 서술이 있다면 사회적 논의와 학문적 토론을 거쳐 수정하면 될 것이다. 역사적 관점에 대한 해석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과 국정화로 학생들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준다는 발상은 논의의 비교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언제부턴가 당,정,청의 일사 분란한 모습이 지고지순한 가치로 각인돼 왔다. 유력대권주자의 정치적 계산과 공천탈락을 의식하면서 침묵하는 다수의 의원과 친박의 돌격대를 자처하는 일부의원들의 동상이몽이 공존하는 정당, 이것이 새누리당의 현 주소다. 당은 청와대를 비롯한 정부가 집행할 정책을 개발하고 민의를 반영하는 기구이다. 그런 만큼 청와대가 나서서 무불간섭하고 여당의원들은 양식과 양심을 저버리고 단일대오로 숨죽이는 구태를 시급히 청산해야 한다.

대통령은 선거와 정치는 국회에 맡기고 국정운영과 개혁과제의 실천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나라경제가 침체국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청년실업이 심각한 상황에 몰려있는데 뜬금없는 역사교과서 국정화로 날을 새울 일은 더욱 아니다. 이제라도 청와대를 포함한 정부와 여당은 국정화를 미루는 고뇌를 국민 앞에 보여야 한다. 의회정치를 존중하고 여야 타협을 가능하게 하는 분위기를 잡아 나아가야 할 것이다.

( 2015. 11. )

알파고와 여인의 웃음

인공지능 알파고(AlphaGo)와 한국이 낳은 바둑 귀재 이세돌의 세기적인 대결은 알파고의 승리로 끝났다. 인간이 만든 소프트웨어가 인간보다도 더 완벽하게 추론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거의 모든 일을 인공지능에게 빼앗길 것이라는 가정이 어렵지 않다.

47년 전, 고등학생일 때 경제와 사회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머지않아 개인전화기를 들고 다니게 되고 마이카시대가 될 것이다.”
그 때는 꿈같은 얘기로 들었다. 불과 50여년이 지난 지금은 어떤가. 손 전화기 없는 사람을 보기 어렵고, 자동차 없는 사람이 드물다.

이세돌이 2016년 2월 22일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지난해 10월에 열린 알파고와 판후이 2단의 기보를 봤을 때 알파고는 이세돌 자신과 승부를 논할 수준이 아니라고 했다. 그만큼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이세돌은 인공지능에게 완벽하게 패했다. 그러고는 인류가 진 게 아니라 이세돌이 진 거라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이 대국으로 이세돌은 2억여 원의 상금을 받았다. 이에 비해 알파고를 개발한 구글회사의 주가 총액은 무려 58조원이나 증가했다. AT강국을 자처하는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너무나 크다. 50년은 고사하고 불과 5개월 만에 인간의 지능을 뛰어 넘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한 것이다. 이렇듯 인공지능의 발전은 이제 시간을 다투는 일이 되고 있다.

세탁기가 빨래를 대신하고, 로봇 청소기가 집안 구석구석을 청소해 주고, 사람이 없어도 자동차가 알아서 다니는 시대다. 하지만 우리가 가장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역시 일자리 문제다. 인공지능이 천재 기사만큼 바둑을 둘 정도라면 우리의 직장 업무를 자동화하는 것쯤은 이제 시간문제일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자동화기술의 확산으로 청년일자리가 많이 줄어 든 상태인데 말이다.

47년 전, 우리 은사님이 유추 하신 것처럼 나는 이런 생각을 가진다. 만약 감정을 가진 로봇이나 인조인간이 등장한다면 신은 이를 허락할까. 웃음을 전하는 지능을 갖춘 로봇이, 즉 인조인간이 생물학적인 인간을 즐겁게 해 줄 수 있다면. 질병을 낫게 하고 행복감을 전하여 준다면.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울 만큼의 가치가 있을 것이리라.

며칠 전 글벗님들과 농원에서 작업을 한 적이 있다. 농원의 특성상 두 명의 여성분이 짝을 이뤄 고단한 작업을 하는데도 뭐가 그리 즐거운 지 까르르, 까르르. 좀처럼 식지 않는 웃음을 이어갔다. 좀 떨어진 곳에서 함께 작업하던 동료까지 웃게 만드는 묘한 바이러스를 가진 웃음이었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기 때문에 행복해 진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살짝만 건드려도 자지러지게 웃는 그녀에게 묘한 매력마저 느껴졌다. 참 좋은 자산을 가졌음에 틀림없다. 그녀가 가진 웃음 DNA를 인공지능으로 변환해서 내 곁에 두고 싶었다. 그러면 모든 질병이 치유되고 행복지수가 껑충 뛸 것
만 같았다.

기계와 인간이 겨루는 세기의 대결에 지구촌이 들썩이고 도처에서는 바둑바람이 일고 있단다. 인간에게 해롭지 않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면 바람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마냥 웃고 즐길 일만은 아니듯 싶어 한쪽 가슴이 시린 것은 나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인가.

(2016. 3. 30)

조율이시 棗栗梨枾

올 해 추석은 어느 해 보다도 풍성한 느낌이다. 이른 벼는 이미 수확해서 지대미로 유통이 되고 있고 사과 배 등 농산물이 풍부해서다. 서울서 오는 아이들이 시간되면 어련히 올라고 시간과 눈을 차가 올라오는 쪽에서 떼지 않으시는 어머니가 이제 팔학년 사반이니 다시 어린 애가 되시려나? 평상시 넉히 두 시간이면 당도하는 거리를 다섯 시간이 걸렸단다.

아이들에게는 제사지낼 때마다 가르치지만 제사상 진설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하기야 글로 써서 외우고 시험을 치러야 하는 교육에 익숙해 진데다가 일 년에 두 번씩 듣는 일로 외울 까닭은 없다. 아들이 주관하는 시대가 되면 제사를 모시기나 할런지 모를 일이지만 조율이시棗栗梨枾, 좌포우혜左脯友醯, 홍동백서紅東白西, 동두서미東頭西尾, 어동육서魚東肉西, 건좌습우乾左濕友, 반서갱동飯西羹東, 생동숙서生東熟西, 초동잔서醋東盞西… 나열하다 보면 어지간한 한문 실력이 아니고는 읽기조차 어렵다. 가가례家家禮라 하여 가문마다 예법의 적용이 다를 수 있다는 말로 위안을 삼아야겠다.

조율이시와 홍동백서는 둘 다 과일을 진설하는 방법이다. 조율이시는 서쪽이 상석이기에 서쪽부터 진설하는 것이고, 홍동백서는 붉은 색 과일은 동쪽에, 흰 색 과일은 서쪽에 놓으
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홍동백서와 조율이시는 진설하는 방법이 반대다. 이것은 조선시대 노론과 소론-남인에서 제사방식이 각기 다른데서 연유하고 있다. 노론은 홍동백서를, 소론-남인은 조율이시를 기본으로 하였다. 그래서 노론의 전통이 내려오는 충청도지역에서
는 홍동백서를, 소론-남인의 전통이 강한 경상도지역에서는 조율이시를 많이 쓰고 있다.

대추(棗)는 통씨여서 절개를 뜻하고 순수한 혈통과 후손의 번창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밤(栗)은 자신의 근본을 잊지 말라는 것과 자기와 조상의 영원한 연결을 상징한다. 밤은 한 송이에 씨앗이 세 톨이니 3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의미한다. 배(梨)는 속살이 하얀 것으로 우리의 백의민족에 빗대어 순수함과 밝음을 나타내 제물로 쓰인다. 배는 씨가 여섯 개여서 육조(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의 판서를 의미한다.
감(枾)은 열매가 열린 나무를 꺾어 보면 검은 심이 있는데 이는 부모가 자식을 낳아 키우
는데 그 만큼 속이 상하였다 하여 부모를 생각하여 놓는다고 한다. 감은 씨가 여덟 개여서 8방백, 8도 관찰사, 8도감사를 뜻한다. 이상과 같이 제사상의 주된 과일로 대추, 밤, 배, 감이 오르는 것은 이들이 상서로움, 희망, 위엄, 벼슬을 나타내는 전통적 과일이기 때문 이다.

예로부터 복숭아를 빼고 모든 과일은 올릴 수 있다고 한다. 고인이 생전에 좋아했던과일
이라면 어떤 과일인들 못 올릴까? 내 지역농협 조합장이 선물로 보내준 메론을 젯상에 올리면서 조상님께 고했다. 조상님의 음덕으로 호사를 누리고 있다고…, 고인이 좋아했다고 해서 담배를 불붙여 제사상 위에 올리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를 못하겠다. 담배 때문에 몇 년은 덜 살았을 터인데 이를 과일의 반열에 올린다는 건 동의할 수 없다.

홍동백서든 조율이시든 우리의 제사문화가 면면히 이어졌으면 좋겠다. 물론 가정의례 준칙에 바탕을 두고 형식보다는 실질적인 숭모의 사상에 뿌리 한 개선은 필요하다.
효 사상을 근본으로 하는 인성교육이 우리공동체를 유지 발전시키는 근본바탕이기 때문
이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국민으로 자녀를 키우는 일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효도는 부모와 조상을 받드는 일이 출발점이다.

2015. 9. 27 추석날 아침

인생 여행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시인이 만약 지금 이 시대를 살다 가더라도 여전히 유효한 표현일까? 국민연금증 카드를 받고 보니 새삼 지나온 날과 살아야 할 날의 경계에 선 기분이다. 어르신 교통카드라는 부제가 붙어 있어 서울을 가면 지하철이 무료다. 나는 경제활동을 하는 한 무료카드는 만들지 않겠다는 생각을 지녀왔는데 막상 올해로 65세가 되고 보니 그럴 필요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인의 연령이 65세에서 70세로 높아져야 한다는 일부의 주장에 박수를 보낸다. 기대여명이 너무 긴 때문이다. 예고가 됐던 일이지만 어느 덫 나도 노인의 대열에 합류했다. 연금공단의 권유가 원인이지만 연금증카드를 받는 기분은 이제 사회의 원로로서의 어르신 대우보다는 저 세상으로의 초대장에 다름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성공한 인생을 연령대별로 표현한 글이 의미심장하다. 10대는 ‘돈 많은 아버지를 뒀으면’, 20대는 ‘명문대학에 다니는 학생이면’, 30대는 ‘연봉 많은 대기업사원이면’, 40대는 ‘이차를 살 수 있으면’, 50대는 ‘공부 잘 하는 자녀가 있으면’, 60대는 ‘아직도 직장서 돈 벌면’이란다. 70대는 ‘병 없이 몸만 건강하면’, 80대는 ‘아직도 본처가 밥 차려주면’, 90대는 ‘전화 걸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100세는 ‘자고나서 아침에 눈 뜨면’ 이란다. 내 인생 전반부는 절반의 성공이랄까. 일중독으로 살았으니 지금 생각하면 내 아이들은 아버지가 저들을 위해서 한 일이 없다고 느낄 만도 하다. 자식위한 헌신의 가치가 그렇다면 모아 둔 재산 다 쓰고 갈 일이다.

고전에서 얘기하는 오복은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이었는데 언제부턴가 노인의 오복은 달리 회자膾炙된다. 건健(아무리 재물이 많아도 건강치 못하면 무용지물), 처妻(옆에서 돌봐주는 배우자가 있으면 행복), 재財(적당한 재산이 있어야), 사事(일이 있어야 나태하지 않고 생활의 리듬도 있다), 붕朋(나를 알아주는 친구가 있는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란다. 예나 지금이나 명예나 권력 따위는 없다. 많은 재산 상속도 없다. 사회로부터 용도폐기된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가 중요하다.

노인이 지갑을 열면 왠지 멋져 보이는 건 나만의 느낌은 아닐 게다. 서울에 사는 자식들한테 아파트를 사 주지 못한 걸 부담스러워 할 일이 아니다. 저들은 맞벌이에 자식을 많이 두지 않았고 부모봉양이 부담스럽지 않다면 얼마든지 부유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으니 그렇다.
노인이 재산 정리해서 스스로 양로원 또는 요양원을 들어가니 부모도 떳떳하고 자녀들도 부담일 수 없다.
70대까지는 건강을 유지해서 직장에 나가 돈 벌 수 있으면 좋겠다. 젊어서 억대 연봉자도 해 보았는데 이제 돈 쓸 일은 별로 없다. 직장은 돈이 목적이 아니라 건강유지가 목적이 된다. 80대에는 아내와 더불어 농장을 가꾸면서 취미를 고양시키는 일에 매진한다. 본처가 차려주는 밥을 먹을려면 무한봉사도 해야 한다. 가사일 분담하고 아내의 건강을 제일로 챙겨줘야 한다. 90부터는 시설에 입소해서 공동생활로 여명을 사회에 봉사한다. 동네 쓰레기라도 줍든가.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재능기부라도 해야 한다.

내 인생 여행을 마치는 그 날까지 성심성의를 다 할련다. 꾸준히 일하고, 붓글씨 쓰고, 수필 쓰고 여기 저기 모임에 회비 밀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 친구만나 내가 밥 사고, 젊은 사람 만나면 당연히 내가 사야 한다. 이 세상 머무를 시간이 별로 없는 사람의 순서가 맞다. 절반의 성공에 온전한 성공을 더하면 중간은 갈성싶다. 노후의 죽을 준비가 중요한 이유다. 유종인이 유종의 미를 거둬야지!

여보게, 밥 먹고 가시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55년 만에 묘표墓標를 세웠다. 진즉 세워드려야 도리인데 이제야 실천에 옮겼다. 그것은 내가 주변머리가 없는 점도 있지만 돌을 설치하면 안 되는 자리가 있다는 말을 들었기에 생각을 접고 지내온 점이 더 큰 이유다.

서瑞자 규圭자 되시는 우리아버지는 스물한 살에 장가들어 서른한 살에 작고했다. 헤아려 보니 어머니와 함께 한 기간이 10년에 불과하다. 5남 1녀 육남매를 남겨 놓으시고 홀연히 가셨으니 어머니한테서 포악한 욕을 들어도 할 말이 없으셨을 게다.

방 세 개짜리 농촌주택에서 증조할아버지 내외분과 종조부 내외분이 함께 사셨다고 한다. 증조할아버지는 사랑방을 쓰고 할머니는 안방을 차지하여 신혼부부가 할머니와 함께 지냈단다. 나를 낳으신 후 종조부 내외분이 분가를 했다지만 그런 상황에서 우리 6남매를 낳고 기른 어머니를 생각하면 기가 찰 노릇이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자에 밝으신 분이었다. 특용작물 재배에도 관심이 많아 박하, 모시 등을 재배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신지식농업인이랄까. 앞마당 주변에 복숭아, 자두, 포도 등 과일나무를 심어 우리형제들은 과일을 많이 먹고 자라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

당시는 가을에 벼를 수확하면 말려서 방아를 찧어 쌀로 보관했었다. 아버지는 통통 방아를 가지고 이 집 저 집을 다니며 작업을 하여 경제적으로 꽤 여유로웠다. 동네에서 유일하게 라디오가 우리 집에만 있었고 우리 집 굴뚝에서 연기가 나면 이웃집들도 따라서 밥을 지었다고 한다. 중절모자에 당고바지와 가죽 잠바를 입고 한양을 다녀오시는 날에는 동네 사람들이 한양소식을 듣는다고 우리 집 사랑방에 모여들던 광경이 생생하다. 정치적인 식견도 높으셨는지 윤보선, 장면, 신익희, 조병옥 같은 분들의 사진을 책상 앞에 붙여 놓고 묵상하실 때가 많았다. 종조부는 자유당 선거운동을 하셨으므로 숙질간에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일이다. 담임선생님과 함께 교장실에 불려갔다. 교장선생님은 나에게 어제저녁에 아버지가 몇 시에 들어오셨는지, 어머니와 무슨 얘기를 나누셨는지 캐물으셨다. 장성한 후 생각하니 갖은 수법을 동원하여 야당을 탄압하던 시대 상황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짧고 굵직하게 살다가 가신 아버지는 스물여덟 무렵 결핵을 얻어 세상을 버리셨다. 지금 같으면 병도 아닌데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신 것이다. 아버지는 허무하게 가셨지만 나에게는 평생을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내 삶 나침반 같은 것이다.
첫째는 아버지의 베품 정신이다. 우리 집은 길가에 있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길을 지나는 사람은 다 아버지의 손님인 양 들어와 쉬었다가 가라면서 호객(?)을 했다. 시도 때도 없이 밥을 차려 내오게 하므로 식구들 밥을 다시 하는 사례가 많았다면서 어머니는 지금도 불평을 하신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의 그런 베품의 덕량德量으로 후손들이 이만큼 사는 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둘째는 담력을 키워주신 점이다. 아버지가 편찮으실 때의 일이다. 새벽녘에 어린 나를 깨워 2킬로 정도 떨어진 약국에 보내셨다. 가는 길목에 공동묘지가 있어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뒤에서 귀신이 발길을 붙드는 것 같아 머릿결이 곤두서곤 했었다. 내가 무섭거나 싫은 내색을 하면 아버지한테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아 참고 다니다 보니 나를 누르는 힘이 저절로 길러진 것이다.
셋째는 아버지의 행보 하나하나는 내 삶의 정답 지와 같은 역할을 한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동리 우물물을 길어다 먹었다. 내 나이 다섯 살 땐가의 일이다. 아버지께서 삽을 들고 나가 파기 시작했다는 우물의 깊이가 열 길이나 되었다. 게다가 아무 기술도 없던 분이 석축石築을 쌓아 완성했다. 풍부한 물의 양과 시원함에 늘 감사하면서 아버지의 의지와 기술에 감복하며 자랐다. 나는 어려울 때마다 ‘아버지는 스물다섯에 저렇게 어려운 일도 하셨는데… ’ 하면서 나의 부족함을 채찍질하곤 했다.

건너 산의 음달에 계시는 산소를 따뜻한 곳으로 옮겨드려야 한다면서도 실행하지 못하는 내가 밉다, 그러나 우선은 표지석이라도 세워야 하겠기에 웅천에 계시는 향석 선생님과 상의했다. 조그마한 자연석에 ‘여보게! 밥먹고 가시게! 柳瑞圭 之墓’ 라고 새겼다.

저 세상에 가신지 반백년이 되는 아버지가 오늘따라 더욱 그립다.
아버지! 영면하세요!

어머니를 찾습니다

어머니의 연세는 올해 여든 넷 이시다. 가끔 하시는 말씀은
“왜 이런지 모르겠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병신이니 원”
그렇게 말씀하시면서도 무엇이든지 하지 못해 안달이시다. 표현하기에 그렇지만 약간의 디멘시어dementia증후군1)이 있는 것이 아닐까 늘 걱정이 된다.

저녁마다 다리 통증으로 잠을 못 이루시니 자식으로 늘 마음이 아프다. 수술, 보약처방, 건강보조기구 사용, 맛사지 등 정성을 다해 보지만 차도가 없으셨다. 그럴 즈음에 고명딸인 누이동생이 병원을 모시고 다녔다. 꾸준히 치료를 받으신 결과 큰 고통은 없어지신 것 같았다. 움직이기에 불편함이 없으시니 기세가 조금씩 등등해지셨다.

어느 날 바쁜 출근길이었다. 어머니께서 강아지와 토끼를 사러 간다며 먼저 차에 타고 계셨다. 한 쪽 손에는 어제 손수 작업한 강낭콩이 들려있었다. 당진 장 주변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막내아들에게 주려는 것이 확실했다.
“어머니! 오실 때 어쩌시려고 장터에 가신다고 하세요. 검정색 강아지를 주문해 놓았으니 며칠만 기다리시면 되는 데요”
라고 말씀 드렸는데도 막무가내셨다.
“내가 젊어서 한 두 번 다녀봤냐. 걱정마라”
오히려 귀찮게 잔소리 하지 말라는 어조셨다.

당진시장 주변에 내려드렸다. 어머니 혼자 가시게 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두 시간 정도 지나 동생한테 어머니께서 오셨는지 전화를 했다. 동생이 오히려 깜짝 놀란다. 동생이 시장주변을 다 살펴보았지만 어머니 행방이 묘연했다. 혹시나 해서 집에도 전화 해보았지만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장구경하실까. 장터에서 동네사람 만나 술 한 잔 나누시는 건 아닐까. 버스타고 오시다가 순성에서 아는 사람 만나 술 한 잔하시는 걸까. 여기 저기 수소문 해 봐도 찾을 길이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조바심은 더 욱 깊어졌다. 저녁 일곱 시부터 약속된 강의를 해야 되는 데 큰일이었다. 찾아 나설 수도 없는 시간이었다.

불길한 생각으로 파출소를 찾아갔다. 경찰관에게 자초지종을 진술하였다. 모든 정보망을 통하여 찾기에 최선을 다 해주었다. 그 때 한 경찰관이 하는 말
“가족이 적극적으로 찾으셔야지 경찰관은 보조자에 불과합니다.”
치매어르신을 잘 보살피지 못했다는 문책이며 훈계처럼 들려왔다. 그 때 오년 전 이 마을 사건이 갑자기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늦은 저녁 남편 산소에 들렸다가 논 수로에 빠져 삼일 만에 시체로 발견된 사건이었다.
“아이고 내 어머니 어찌 되셨으면…. 이 죄인을 어찌할 것인가”
당황스러웠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강의 시간 약속이 임박하여 자동차로 출발하려는 데 경찰관으로부터 파출소로 들어오라는 손짓이 섬광처럼 스쳤다. 들어서자마자 여순경이

“할머니 찾았습니다”.

담당경찰관이 어머니 실종사건 해결의 경과를 설명해 주었다. 당진장터에서 약 4km 정도 떨어진 면천소재 주유소 앞에서 홀로 계셨다고 했다. 한쪽 손에 지팡이를 짚으시고 다른 손에는 검정비닐을 들고 계신 할머니를 주유소 직원이 발견하여 신고하였다고 하였다. 사시는 곳을 물으니 ‘거문들’이라고 하셨단다. 주유소 직원이‘거문들’은 합덕 밖에 몰라 어머니가 안내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차로 이동하였는데 엉뚱하게도 예산군 봉산면 방향이었다고 했단다. 합덕이 아닌 거문들이 또 있는지 의심스러워 그 곳 치안센터를 찾게 되었다고 했다. 결국 신고 파출소에서 타전한 『SOS』 때문에 어머니를 다시 찾게 되었다. 강아지도, 토끼도, 막내아들 주려던 강낭콩도 까맣게 잊어버리셨던 것이 아니었을까. 아직 남아있는 기억을 살려내어 무작정 순성 집을 향해 오신다는 것이 면천으로 접어들어 걸으셨으리라.

“어머니 죄송합니다.”

얼마나 고생하셨을까. 땀은 얼마나 많이 흘리셨을까. 무척 배도 곺으셨을 터인 데, 성의 없고 무책임한 내 자신이 미웠다. 평소 어머니 진지 상을 잘 챙겨드렸던 아내에게 밖에 나가서 활동하라고 했던 나였다. 평소 아내가 집에 없을 때는 밥통에 있는 밥도 챙겨 드시지 아니하셨다. 그 이유를 이 못난 아들은 며느리 못나가게 억지를 부리신 것으로 의심했었다. 어머니의 치매를 모르고 지낸 내가 한없이 부끄럽고 죄송스러웠다.

다시금 파출소의 경찰관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이 들려오는 듯했다.
“할머니께서 그런 상태이신데 신상과 연락처가 적힌 목걸이를 채워드렸어야 하지요”
그 충언이 부끄러웠고 깊이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요양보호사고 사회복지사이면 무엇 한단 말인가. 이 세상 오직 한 분! 내 성공을 위해 불철주야 고생하신 사랑하는 어머니, 그 한 분도 제대로 돌보아 드리지 못하면서 남에게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한 없이 부끄러운 생각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거동이 불편하시거나 치매 걸리신 어르신이 계시면 요양보호사의 재가서비스나 생활시설로 모시고 가족들은 자기 할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어머니께서는 늘 그러셨다
“내가 왜 치매환자야.. 내가 아들이 없나, 왜 생으로 고려장 당하느냐“
라고 역정을 내신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불평하시는 어머니를 늙으셔서 그러시겠지. 핑계 아닌 핑계로 단정한 내 생각이 잘못이었다.

이번 사건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내 스스로 모실 수 있는 데 까지는 집에서 모시는 게 자식의 도리이다, 철저한 준비와 사랑이 가득한 관심으로 존귀한 나의 어머니를 정성껏 모셔야 되겠다. 나 자신도 점점 노인을 향하여 가고 있다. 아이들한테 짐이 되지 않는 그런 아버지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난 충분히 혼자서 생활 할 수 있어!’ 자만하고 고집 피다가 치매 증세가 찾아 와서 그런 저런 판단을 못하게 되면 나도 어머니 같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 아닌가. 이래도 문제, 저래도 문제, 인생은 고해라고 한 어느 철학자의 말이 틀리지 않는다. 백세 건강센터에 가서 어머니 신상표시 목걸이 하나를 당장 마련해야겠다.

2015. 7. 27

1)dementia는 『치매』라는 의학적 용어. 어원은 dement. 망령되다. 정신이 나갔다의 명사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