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사람을 평할 때 신언서판身言書判을 기준으로 했다. 내가 성장해서 직장생활을 할 때만 해도 글씨솜씨가 어느 정도 출세에 영향을 미쳤다. 글씨를 잘 써서 학력은 없어도 공직에 발탁된 경우가 많았고, 공무원은 도 단위 또는 중앙부서로 발탁되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나도 예외가 아니어서 근무지마다 동료들보다 초과근무를 더하곤 했는데 대전에서 근무하던 중 승진에서 탈락하면서 마음을 다스리는 수단으로 붓을 잡은 지 어언 30여년이 흘렀다.
내가 사용하는 아호雅號는 몇 개가 되지만 미석嵋石을 주로 쓰고, 자字는 성훈成勳이다. 1950년 충남 당진시 순성면 봉소리 1077번지에서 태어났다. 5월30일 태어나서 그해 6.25가 발발했으니 유년은 고달프게 성장했다. 순성초등학교, 면천중학교를 마치고 예산농고로 유학하였고 1969년 농협중앙회에 입사하여 2008년 퇴임했는데 현직에 있으면서 대전의 장암 이곤순 선생님, 서울의 다민 김홍석 선생님에게 사사했고 퇴임 후에는 웅천의 향석 전홍규 선생님에게 사사하여 일중 一中, 초정草丁계의 학풍을 따르고 있다.
한국미협, 대한서도협회 등의 공모전에서 입,특선하였고 서해미술대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아 초대작가가 되었다. 2010년 당진 문예의전당 대 전시실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고대주민자치센터, 순성주민자치센터 등에 출강하는 외에 2014년 당진문화원장에 취임하여 서예 무료 강좌를 개설 운영 하고 있고 고구려, 신라, 백제비 등의 연구와 우리글서체쓰기 과정을 문화원에 개설하는 등 서예발전에 일조를 하고 있다.
아울러 ㈜한국금석문각지예술연구소를 설립하여 명비보급에도 앞장서고 있는데 향석 선생님의 작품 활동을 돕기 위하여 회사를 설립했고 나는 대표를 맡고 있지만 보조자에 불과하다. 향석 선생님은 서울에서 수강생이 이백여명에 달하는 학원을 폐업하고 우리나라 오석을 세계에 알리겠다는 신념으로 웅천에 낙향하셔서 보령시 오석홍보대사를 역임하고 계신다. 광개토호태왕비廣開土好太王碑 연구에 있어 국내 최고권위자로서 실물크기의 비를 경기 구리시청 공원 등에 설치한 바 있으며 서울 양천구 비림공원, 경북 황간 비림공원을 조성한 바 있다. 당진지역에는 시청 광장에 세운 개청開廳 축시비祝詩碑, 왜목항에 세운 2천년 축시비, 삽교천에 세운 역대 대통령 글씨 통일염원탑統一念願塔 등이 연구소가 설치한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컴퓨터의 보급과 함께 악필惡筆인 사람도 글씨 못 쓰는 것이 흉이 아니고, 굳이 익히지 않아도 탓하지 않으니 서예학원이 밥 먹기 어려운 세상이지만 어느 행사장엘 가나 방명록에 글씨 잘 쓰는 것도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요 마음을 가라앉히고 성정性情을 기르는데 안성마춤이니 2018년부터 시행예정인 초.중.고등학교 국.한문 혼용 교육과 함께 국민적 관심과 참여가 필요하다.
결혼식에 혼서지를 써주는 일, 축의금에 축필을 함께 보내거나 주례사에 작품을 써서 넣어주는 일, 집짓는데 상량글씨를 써 주는 일, 연하글씨를 써서 보내는 일, 틈틈이 작품을 쓰는 일 등 생활 속에서 서예는 나의 일과가 되었다. 동호인 중에는 파킨슨병으로 오른팔을 떨지만 붓만 잡으면 떨림이 없다는 기이한 분이 계신다. 나 또한 붓만 잡으면 시간가는 줄 모르니 서예만큼 좋은 취미가 없지 싶다. 노년이 되어 친구가 없어도 나는 외롭지 않을 취미를 가진 것이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개인전 때 인사말로 인도의 교육자 케리여사의 어록을 인용했던 기억이 새롭다.
‘현대인에게 있어 세 가지 과오가 있다면 첫째는 모르면서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알면서 가르치지 않는 것이요, 셋째는 할 수 있으면서 하지 않는 것이다’ 라고 했는데 내가 조금 아는 예술을 가르치는 일로 현대인의 과오를 범하지 않고자 한다. 농촌실정에도 맞고 직장인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 주로 야간강좌를 열고 있는데 주경야독晝耕夜讀하는 학우들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느낀다.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교육, 현대서예의 흐름에 따르는 교육, 현대인에게 필요한 생활서예, 법첩만을 써대는 학습에서 국한문을 혼용하는 우리서체 학습으로 세예교육의 틀을 잡아나갈 생각이다.
조선 성리학의 대가이며 이이 이율곡, 우계 성혼과 상호 교류하였던 구봉 송익필선생이 어지러웠던 정국을 피해 우리 당진에 낙향하여 후학을 가르치는 일에 몰두하셨던 위업을 기리고 학문적 정신을 추념하는 서예대전을 만들어 역동하는 당진을 전국에 알리는 일을 하고자 한다. 지난 11월 11일 제 416주년 제향과 추념식을 거행 했던 바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할 일이다.
*약 3천년 전 은나라 성탕(成湯)의 반명(盤銘:세숫대야에 새겨진 글씨)에 쓰여진 글 苟日新日, 日新又日新(구일신일, 일신우일신: 진실로 날로 새롭고 날마다 새로워지며 또 날로 새로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