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곡 진 시라타니 도로를 따라 돌고 돌아 30분 정도 달렸다. 시라타니운스이쿄의 작은 사무소에서 입장권을 구입하고 체력이 허락하면 가장 안쪽에 위치한 다이코이와까지 발길을 옮겨볼 작정으로 신발 끈을 다시 묶는다. 소요시간이 6시간 넘게 걸린다는 만만찮는 거리다. 스틱의 고무 버킹을 확인했다. 4시 반이 산을 내려가는 마지막 버스였다.
협곡은 미야노우라가와의 하천인 시라티가와 상류에 위치한 자연 휴양림에 자리한다. 주요 스기 삼나무만 해도 10여그루가 넘는다. 야쿠시마의 해발 500m를 넘는 산지에 자생하고 있는 삼나무 중 수령 1,000년 이상의 삼나무는 ‘야쿠스기(屋久杉)’, 1,000년 미만의 삼나무는 ‘코스기(小杉)’라고 부른다. 삼나무의 수명은 일반적으로는 500여 년이다. 그러나 영양이 부족한 화강암 산지에서 느리게 자란 야쿠시마의 삼나무는 재질이 치밀하고 수지분이 많아 잘 썩지 않기 때문에 다른 지역의 삼나무보다 훨씬 오래 살 수 있다. 그래서 수령 2,000년이 넘는 거목들이 우람하게 독특한 모습으로 버티고 있다. 협곡 안에는 비가 많이 오면 골짜기를 건널 수가 없는 구간도 서너 군데나 있다.
드넓은 휴식의 바위에 자연스럽게 파인 계단을 오르자 물소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소리처럼 먼저 가슴에 와 닿는다. 물소리를 길잡이 삼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가볍게 계단을 몇 번 오르내리자 운치 있는 사쓰키 구름다리가 나타난다. 사진 찍기에 좋은 장소다. 원시림과 청정 자연이 잘 어우러진 협곡으로 내리뻗는 물줄기, 탁 트인 하늘, 특징적인 삼나무들, 차림도 화려하게 완벽하다.
초록의 이끼 융단이 묵직한 습기를 머금고 원시적인 생명력으로 완전히 계곡을 장악하고 있다. 벨벳보다 매끄럽고 폭신해 보여 저절로 손이 간다. 이 길의 매력은 이끼 낀 계곡과 그 계곡들이 모여서 만든 깊고 맑은 협곡이다. 자연이 만들어낸 청아한 음악이 나를 채우고 그 음악으로 이곳에 온 것을 환영받는 느낌이다. 눈 호강, 귀 호강 부러울 것이 없다.
계곡의 검푸른 이끼 낀 바위들이 만들어내는 괴이함을 넘어 선 신비로움에 압도된다. 년간 10000밀리미터가 넘는다는 강수량에 비가 제일 걱정이 되었지만 나뭇잎 사이로 파고드는 햇살은 단정하고 상쾌하다. 몇 년을 살았는지 가늠할 수 없는 이름 붙여진 야쿠스기를 우러러보며 감탄하며 지난다. 옆을 걷고 있던 해경선생님은 이런 곳 이런 날엔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바람이 불어야 괴기스런 삼나무에서 나는 소리로 원령공주의 분위기가 난다고 맑은 하늘에게 투덜댄다. 자연의 위대함에 말을 잃은 나는 그저 사진기를 눌러대기에 바쁘다.
야쿠스기(삼나무)는 원래 신목(神木)으로 추앙되어 베지 않았다지만 베기는커녕 형용하기 어려운 근엄함이 주위를 압도하니 다가가기도 어렵다. 이런 신목이었지만 16세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으로 절의 건축을 위해 벌목되기 시작되었고, 대규모의 벌채를 목격한 야쿠시마 주민들은 1971년 ‘야쿠시마를 지키는 모임’을 결성하여 삼나무의 벌목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였고 1980년대에 들어서야 멈췄다. 문명의 발전은 파괴가 불가피하지만 이 길을 걷다보면 자연과 인간이 공존이 가능하겠다는 밝은 느낌이 온다. 이 길은 억지가 없다. 인간이 걸을 수 있지만 편리하게 무엇인가를 만들고 표시해 주지 않았다. 세밀한 눈과 조심스런 걸음을 걷도록 만들어졌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면서 걷다보니 원령공주의 출입문인 구구리스기 삼나무가 나왔다. 거대한 삼나무는 말라 흔적으로 남아있지만 주변에 기생하는 이끼에서는 안개가 피어나고 있다. 초목이 무성한 땅 전체가 내는 달콤함이 올라오고 짙은 녹음의 벽속에 갇힐 것 같은 몽환적인 기분이 든다.
걷던 길이 조금 경사가 심해지며 등산로가 되었다. 일행 중 일부는 사슴의 집 삼나무 주변의 쉼터에서 쉬기로 하고 둘은 본격적인 등산로로 접어들었다.
해발 900정도에 이르자 원령공주의 이미지를 떠 올렸다는 이끼의 숲(모노노케히메노모리)이 나왔다. 지코가 알려 준 신령스런 곳. 사슴 신이 살고 있다는 숲.
둥글둥글한 바위들, 그 위를 빼곡하게 덮고 있는 검푸른 초록의 이끼, 묵직하게 습기를 머금은 이끼들 위로는 나뭇잎 그림자가 온갖 형태의 모자이크를 만들어내고 있다. 가볍게 흔들거리는 대낮의 눈부신 산 풀, 넓은 이끼의 공간에 자연스럽게 쓰러진 나무들. 인공의 질서라곤 찾을 수 없는 기묘한 삼나무들은 농밀한 나뭇잎과 가지가 어울려 근사한 배색을 이루면서 죽은 등걸 위에 또 다른 생명을 키워내고 있었다. 햇빛이 부드러운 잎사귀에 스며들어 자잘한 그림자를 만들면서 빨려들어 갈 것만 같은 아름다움을 주변에 아낌없이 흩뿌리고 있다. 아름다운 경관을 헤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원령공주 그 이상의 이미지가 나와도 될 것 같다.
다시 이름이 있는 수많은 삼나무를 지나 오르고 올라 드디어 해발 1050M의 다이코이와 바위에 도착했다. 와!! 시야가 크게 열린다. 근사한 수목의 향기를 실어 오는 바람이 구름을 동반해 날카로운 햇빛을 몰아내자 우리는 숨을 멈춘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그것에 맞춰 온 몸이 활기차게 고동친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산맥이 주는 멋진 전망. 한낮의 햇볕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고독하게 서있는 고사목. 여러 차례 홍수가 할퀴고 지나 간 흔적으로 토사가 무너져 내려 암석이 그대로 드러난 거친 산 표면은 아주 거칠고 정열적인 또 다른 광경이다. 구석구석까지 허세를 부리려는 여름더위에도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발랄하고 만족스럽다. 쓰러진 나무를 의자삼아 조각조각 떠 있는 새하얀 구름이 물처럼 술술 흘러가는 모습을 태양이 내게 표적을 좁히며 밉살스런 웃음을 보낼 때까지 바라본다. 이 모든 광경은 힘들게 올라온 사람 들 만을 위해 존재한다.
내려오는 길은 범람 주의라고 경고문이 쓰여 진 부교스기코스를 택했다. 비가 내리지 않아 험한 곳은 없었다. 이름을 가진 스기 삼나무들과 인사를 할 때마다 대를 이어 거듭나는 생명력에 경의를 표했다.
잔인한 햇빛이 한여름의 산천을 장악하며 탐욕을 부리자, 발걸음이 무거운 우리는 우렁차게 큰소리를 내면서 굽이굽이 흐르는 계곡물에 뛰어들었다. 서늘한 냉기로 홀딱 벗겨진 상쾌함이 몸 전체에 들어찼다. 더위가 담박하게 물러간 것은 덤이었다.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마지막 버스는 산을 내려 간 뒤였다. 시간의 흐름과 지나치게 수작을 부리며 해롱거린 탓으로 비싼 택시요금이 지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