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적이야말로 스승이다.
누군가가 욕망의 힘으로
내 것을 모두 훔치거나 훔치려 할지라도
몸과 부와 삼세의 미덕들을
그에게 돌리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다.
자신에게 티끌만큼의 잘못이 없음에도
누군가가 당신의 목을 벨지라도
자비의 힘으로 그들의 모든 악업을
자신이 받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다.
누군가가 당신에 대한 갖가지 험담을
모든 삼천대천세계에 퍼뜨리려 외칠지라도
자비로운 마음으로 보답해
그의 덕행을 이야기하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다.
아들과도 같이 귀하게 돌보아온 사람이
자신을 원수처럼 보게 될지라도
질병에 걸린 아들의 어머니처럼
더욱더 사랑하는 것이 보살의 수행이다.
히말라야에서 늘 이런 보살의 수행법을 권하는 달라이 라마. 그를 찾아가는 히말라야 초입에서 원숭이들은 관광객들이 던져주는 바나나와 과자를 얻으려고 팔을 들어 환영했다. 하지만 그런 즐거움도 잠시, 그 뒤로 천길낭떠러지 위에 간신히 버티고 선 산길로 곡예를 하듯 기어가는 버스 안에서 다섯 시간 이상 가슴을 졸여야 했다. 호랑이가 출몰하는 곳이라는 뜻에서인지, 군데군데 호랑이가 그려진 도로 표지판이 서 있다. 뉴델리에서 찬디가르까지 기차로 세 시간, 다시 찬디가르에서 다람살라까지 버스로 열 시간 걸려 도착하니 멀리 희뿌옇게 만년설이 보였다. 천길낭떠러지 위를 돌고 돌다 보니 어느새 범속(凡俗)의 경계는 사라졌다.
달라이 라마는 해발 1800미터를 휘감아 도는 구름과 바람 위에서 만년설을 바라보며 살고 있었다. 다람살라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달라이 라마의 궁전과 나란히 서 있는 남걀 사원은 티베트 망명정부 지도자 달라이 라마를 따르는 300여 명의 스님들이 수행하고 있는 달라이 라마의 개인 사찰이다.
고향을 떠나온 티베트인들의 고달픈 삶이 창문 사이로 드러나는 사원의 한 골방에서 랑왕 또뗀 스님이 티베트 불교의 수행 지침서인 <<보리도차제론>>에 따라 수행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티베트 불교의 4대 종과 가운데 달라이 라마가 수장으로 있는 게룩종(황모파)의 종립대학 격인 도 벵갈로의 세라승원에서 무려 13학년 과정의 대승교학 과정을 마치고, 스승 달라이 라마를 찾아 이곳에 왔다.
학교를 나와 티베트인들이 고통 받는 삶의 현장으로 돌아온 그에게 불범은 더 이상 빛 바랜 책 속의 문자가 아니라 고통스러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삶을 해결할 돌파구였다.
또뗀 스님의 삶은 다른 티베트인들 못지않게 아팠다. 1959년 중국군의 티베트 침공 때 여덟 명의 형제를 한꺼번에 잃은 뒤 중국군에 대한 깊은 상처와 원한을 안은 채 가슴앓이를 하던 부모를 그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피폐해진 고향 캄에선 공부할 기회조차 없던 그가 티베트를 탈출한 것은 열세 살 때. 3일 동안 차를 타고 티베트 수도 라싸에 도착한 뒤 다시 대상로를 따라 히말라야를 넘었다. 낮엔 중국군의 눈을 피하기 위해 숲속에 숨었다가 밤에만 산을 넘은 지 3개월 만에 인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몇 년 전에 고향 사람으로부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쯤 되면 그의 마음은 분노로 이글거리는 지옥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분노가 스며들려고 할 때마다 그는 티베트의 기본 명상 수행법인 비로자나칠법에 따라 결가부좌로 앉는다. 이어 호흡을 하나둘 세며 번뇌망상이 없는 투명한 유리처럼 마음을 비운다. 그리고 억겁의 세월을 반복해온 자신과 중생들의 고통스런 윤회를 인식하며, ‘지금이야말로 집착에서 벗어날 때’라고 생각한다.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굳게 믿고 있는 스승 달라이 라마의 사진을 문 위에 걸어놓고, 지극한 존경을 나타내곤 하는 그는 티베트의 전통대로 스승을 삼보(불, 법, 승)를 실현하는 불법 자체로, ‘깨달음의 교과서’로 삼는다.
“반대자가 그대를 해치려는 듯 보일지라도 결국에는 그들의 파괴적인 행위가 그들 자신만 해치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곤경이 우리에게 닥치기를 기다려서 자비와 이성과 인내를 실천해야만 한다. 누가 그런 기회를 만들어주는가. 그것은 우리의 친구들이 아니라 적이 해줄 수 있다. 그들은 우리에게 문제 거리를 주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으로 배우기를 원한다면, 적이야말로 최고의 스승이라고 생각해야한다.”
분노가 스며들려 할 때마다 스승 달라이 라마의 가르침이 그의 가슴을 녹였다.
“분노와 증오는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힐 것이고, 평온한 마음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우리의 시도를 무너뜨리고 말 것이다. 분노와 증오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적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일생에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일시적인 적이 아니라, 우리가 가장 열심히 대항하고 무찌를 필요가 있는 적이다.”
스승 달라이 라마의 모습을 관하며, 그 자비로운 보리심에 흠뻑 젖은 또뗀 스님이 드디어 눈을 떴다.
“세상에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티베트에 불법이 들어오기 전 티베트인들이 당나라와 주변국들을 침략했고, 현대에 와서는 세상이 변하는데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은 과보를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한 치도 어긋남이 없는 인과의 법칙을 알았기에 다시 증오의 씨앗을 심을 수는 없는 일이다.”
남걀[法勝]이란 이름처럼 불법은 분노의 불길을 눌러 이긴 듯했다.
칼라차크라를 수행중인 자도 린포체 스님. 그도 아픈 과거를 간직하고 있긴 마찬가지다. 세 살 때 고향인 티베트의 남소카에서 출가한 그는 중국군의 침략 직후 스님들의 손에 이끌려 티베트를 탈출 했다. 그때 미처 탈출하지 못한 14명의 스님들은 손이 뒤로 묶인 채 중국군이 쏜 총에 난사당해 숨졌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스님은 가슴이 미어져 내리는 아픔을 겪었다. 이곳에 있는 대두분의 스님들이 랑왕 또뗀 스님이나 자도 린포체 스님과 같은 상처를 갖고 있다.
1959년 중국군의 침략 후 티베트의 전체 인구 600만 명 가운데 무려 5분의 1인 120여 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니 국민들 사이에선 무력항거를 주장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심지어 여자들조차 부엌칼이라도 들고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티베트에서 도망쳐 나와 다람살라를 비롯한 인도와 서방 등지에 흩어져 사는 12만 명의 티베트인들이 독립전사로 나서서 세계 곳곳의 중국 대사관이나 중국인들을 향해 보복의 칼날을 간다면 이슬람교 과격파 못지않은 분란의 씨앗이 될 게 분명하다.
그러나 달라이 라마는 불법의 가르침으로 이들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살생의 윤회를 스스로 놓아버리게 하고 있다.
티베트인들의 달라이 라마에 대한 존경심은 놀라울 정도였다. 다람살라의 가게마다, 집집마다 달라이 라마의 사진을 걸어놓고 존경을 표시하며, 달라이 라마의 얘기를 할 때는 눈빛이 달라졌다. 부모 형제를 잃은 티베트인들이 분노를 삭일 수 있는 것도 달라이 라마에 대한 존경심 때문일 것이다.
자도 린포체 스님이 수행중인 것은 무상유가(요가), 티베트 밀교다. 티베트 불교는 계(계율), 정(선정), 혜(지혜)의 삼학을 배우는 경전 수행과 탄트라 수행을 통한 두 가지 깨달음의 길을 열어두고 있다. 초기에 인도불교를 받아들였기에 대승불교의 두 사상인 중관사상과 유식사상을 모두 수용하게 된 것이다. 당시 인도 불교는 힌두교의 요가와 탄트라 수행법이 결합되어 있었다.
탄트라는 정신 개발을 위해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과 혐오, 즉 근원적인 충동을 부정하지 않고, 건전하고 유익한 힘으로 정화하는 것이다. 이른바 ‘바즈라야나’로 알려진 티베트 탄트라에는 다양한 명상법이 있다.
탄트라의 특징은 다른 불교보다 훨씬 스승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이다. 그래서 불·법·승 3보 가운데 불·법을 함께 지닌, 존경하는 스승으로부터 비밀스럽게 법을 전수받는다.
자도 린포체 스님은 무상유가를 통해 ‘자신이 곧 본존불’임을 자각한뒤 신체적 에너지 흐름을 조절해 몸 자체를 부처로 바꾸는 수행을 하고있다. 에너지를 차크라로 모으는 자도 린포체 스님에게서 분노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히말라야의 만년설에 반사된 빛처럼 밝은 법열의 환희가 그의 얼굴에서 피어난다.
“사랑과 자비를 품은 사람이 인내를 실천하는 것이 기본이고, 그 실천을 위해 적은 필수불가결한 존재다. 그러므로 우리의 적에게 감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우리가 평온한 마음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최대의 도움을 줄 수 있는사람이기 때문이다.”
또뗀 스님은 이런 달라이 라마의 자비로운 말을 되새기며, 중국인을 위한 기도로 수행을 마친다.
“그들이 번뇌와집착을 떠나 다시는 업을 짓지 않을 ‘깨달음’을 얻게 하소서”
그의 기원이 히말라야의 메아리로 울려 세속을 향한 물음이 된다. 과연 누가 승리자이며, 누가 큰 자일까.
나라와 수많은 동족을 잃은 아픔 속에도 오히려 세계인들의 고통을 어루만지고 상처를 치유해주고 있는 달라이 라마는 활수했다. 그에게서 무슨 ‘~체’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다. 티베트인들은 감히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않는다. 그러나 달라이 라마는 방문자들이 자신을 ‘살아있는 부처’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한 사람의 승려일 뿐인데 그런 얘기를 들으니 불편해진다”며 “우리는 똑같은 사람이고, 똑같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들”이라고 거듭 말했다. 말이나 행동에서 전혀 권위의식이 느껴지지 않았고, 티 없이 맑은 소년처럼 평안한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그런 평화의 기운은 한반도에도 전해졌다.
“무력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무력을 통한 문제 해결은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 가장 좋은 것은 대화를 통한 해결 방식이다. 생각이 다른 사람과도 대화를 위해 한 발짝 나아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는 다시 불법의 핵심을 통한 평화의 길을 열었다.
“세상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사람과 사물은 인연에 의해 존재한다. 모든 사람과 동물, 사물에 대한 자비로써 마음의 평화를 이룰 수 있다.”
달라이 라마는 새벽 3시 30분이면 어김없이 잠자리에서 일어나 경전을 읽고, 명상을 하고, 오후에는 전통적인 승단의 규칙에 따라 일체 음식을 먹지 않으며 수행자의 본분을 지키고 있었다.
태어난 것은 죽지 않을 수 없고, 죽을 때는 정해져 있지 않으니, 내게는 지체할 시간이 없네. 그대 또한 윤회의 굴레에 매인 세속 욕망 모두 버리고, 에베레스트로 가자.
티베트인들의 가슴속에 에베레스트처럼 우뚝 서 있는 밀라래빠(1040~1123)의 노래다. 원래 밀라래빠의 집은 큰 부자였으나 그가 일곱 살 때 아버지가 병으로 사망한 뒤 큰아버지가 밀라래빠와 어머니를 속이고 모든 재산을 빼앗았다. 그 후 그는 극도의 가난 속에 버려졌다. 원한에 사무친 그의 어머니는 원수를 갚기 위해 밀라래바에게 살인 기술인 흑주술을 배우도록 길을 떠나 보냈다.
밀라래빠는 흑주술을 배워 큰아버지와 그의 아들, 며느리, 친구 등 35명을 몰살시켰다. 그의 어머니는 승리의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밀라래빠는 자신이 저지른 무서운 죄악을 깨닫고 괴로워했다. 윤회의 법칙대로라면 그는 지옥에 태어날 수밖에 없었다.
밀라래빠는 스승 마르빠를 만나 6년 동안 가혹한 시험을 통과한 뒤 마하무드라의 법을 전수받았다.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던 살인마가 고행을 거쳐 한 생에 성불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티베트인들은 불교가 소승에서 대승으로, 다시 금강승(티베트 불교)으로 발전했고, 오로지 가장 근기가 높은 수행자들에게 전해지는 금강승을 통해서만 밀라래빠처럼 성불에 이를 수 있다고 믿고 있다.
티베트 불교는 794년 티베트 왕 앞에서 벌어졌던 ‘삼예의 논쟁’을 통해 뿌리를 내리게 됐다. 그 논쟁에서 중국 선종의 마하연 대사가 인도 카말라실라 대사에게 패배를 시인함으로써 중국 선종의 포교가 금지됐다. 그 후 티베트에서 대립 중이던 현교와 밀교를 ‘보리도등론’이라는 하나의 체계로 집대성한 인도 아티샤 대사의 노선을 이은 쫑카파 대사가 14~15세기에 중관의 공사상을 바탕으로 저술한 <<보리도차제론>>이 지금까지 수행의 지침이 되고 있다.
티베트 불교는 세상에 알려진 대부분의 수행법이 망라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치밀하고 체계적이다. 먼저 수행자는 오체투지(전신을 땅에 닿게 하는 절)와 진언, 구루요가, 만달라 공양을 각각 10만 번씩 해야한다. 본격적인 수행에 들어가기 전에 부정적인 업을 정화하고, 과거의 잘못을 참회하며, 공덕을 쌓는 예비 수행인 셈이다. 보통 에비 수행 기간은 6개월에서 1년이다. 예비 수행을 마치면 법신, 보신, 화신의 3신 부처를 내면에 정립하는 기초 수행을 한다. 기초 수행이 끝나면 본수행에 들어가기 전에 자격을 가진 스승으로부터 직접 본존불의 가르침을 전수받는 관정(灌頂) 의식을 거쳐야 한다.
본수행에선 티베트 밀교의 위대한 스승인 나로빠가 만든 나로 육법을 수행한다. 나로 육법에는 뜸모, 몽환, 환신, 정광명, 중음 수행 등이 있다.
뜸모 수행은 좌우 맥으로 흐르는 기를 중맥으로 모아서 흐르게 하는 것이다. 호흡을 통해 에너지가 차크라를 통하면서 지복감을 체험하고, 그 지복감 속에서 나와 모든 현상의 공성(空性)을 체득하도록 한다. 뜸모 수행이 깊어지면 맑은 가을날 동트기 전의 새벽하늘과 유사한 정광명(淨光明) 상태를 체험하게 된다.
몽환(夢幻)은 꿈속에서 수행하는 것이다. 먼저 잠자기 전 굳은 결심으로 꿈을 인식하고, 조작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꿈속에서 두려운 대상이 환(幻)임을 알아서 두려움을 극복한다. 또 꿈 자체가 환임을 알고 일체 현상이 환임을 자각하게 된다.
죽음의 단계에서도 수행하는 것이 티베트 불교의 독특한 점이다. 그것을 중음 수행이라고 한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죽음의 단계에선 누구나 저절로 모든 기운이 중맥으로 모이고, 가슴차크라로 집중된다고 본다. 그래서 저절로 앞의 여덟 가지 수행 단계가 진행된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정광명 단계가 나타난다. 정광명은 모든 것의 근본 실체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서 ‘아녹다라삼먁삼보리’로 표현하기도 하며, 비로자나불의 모습으로 사망자의 영혼 앞에 나타난다고 한다. 이때 사망자가 정광명을 인식해 정광명의 투명한 빛 속으로 들어가면 더 이상 태어남도 죽음도 없는 근원의 세계로 들어가 해탈 성불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생전에 이런 수행을 하지 못한 이들은 극히 짧은 순간만 인식해 합일의 기회도 놓치고, 중음신을 받아서 다시 윤회하게 된다.
따라서 티베트에선 사망자를 성불로 이끌기 위해 임종의 순간부터 사망자 옆에서 티베트 최고의 경전인 <<바르도 퇴돌>>(듣는 것만으로 영원한 자유에 이르는 가츠림 또는 사자의 서)를 읽어준다. 죽는 자들은 산 자보다 훨씬 지각이 예민하고, 기억력도 아홉 배나 높으므로 생전의 지적 수준에 관계없이 이 책을 읽어주면 사후 세계에서 구원을 받을수 있다고 한다.
<<사자의 서>>는 죽음의 순간에 일어나는 죽음의 현상들로 사자를 인도하는 방법 외에, 사후 세계의 중간 상태에 놓여있는 동안 존재의 근원으로 사자를 인도하는 방법, 사자가 환생할 곳을 찾고 있을 때 자궁 입구를 막아주는 방법 등을 상세히 안내하고 있다.
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이제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이 다가왔다. 그대는 이 세상을 떠나고 있다. 하지만 그대만이 유일하게 떠나는 자는 아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이 세상의 삶에 애착을 갖거나 집착하지 말라. 그대가 마음이 약해져서 이 세상에 남겨둔 것에 아무리 집착할지라도 그대는 이제 여기에 머물 힘을 잃었다. 그대가 집착을 버리지 않는다면 그대는 이 윤회계의 수레바퀴 아래를 헤매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다. 그러니 마음이 약해지지 말라. 다만 진리와, 진리를 깨달은 자와, 그를 따르는 구도자들을 기억하라. 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초에니 바르도(불확실한 상태)에서 그대에게 어떤 공포와 두려움이 밀려올지라도 그대는 다음에 하는 말을 잊지 말라. 이 말에 담긴 뜻을 마음에 새기고 앞으로 나아가라. 이속에는 그대를 존재의 근원으로 인도하는 중요한 비밀이 있다. 그대는 나를 따라 이렇게 말하라. 아, 나는 지금 불확실하게 존재의 근원을 체험하려 하고 있다. 나는 모든 환영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과 놀라움을 접어두리라. 그리고 어떤 환영들이 나타나든지 그것이 내 자신의 마음속에서 나온 것임을 깨달으리라. 그것들을 바르도(불확실한 상태)의 환영임을 나는 꿰뚫어보리라. 위대한 목적을 성취할 이 중요한 순간에 나는 내 사념들의 표현인 평화의 신들과 분노의 신들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그대는 내가 읽어주는 이 구절들을 잘 따라 외우라. 그리고 그 안에 담긴 뜻을 마음에 새기고 앞으로 나아가라. 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무섭고 두려운 어떤 환영이 눈앞에 나타날지라도 그것들이 자신의 마음에서 투영되어 나온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 중요한 비밀을 잊지 말라. 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그대의 육체와 마음이 따로 분리되어 있는 이때, 그대는 순수한 진리의 세계를 잠깐 경험하게 되리라. 그것은 밝고 눈부시고 미묘하며 무서울 정도로 빛이 난다. 마치 봄날의 풍경 속을 가로질러 가는 신기루처럼 끝없이 물결치며 흘러간다. 그러나 그것들을 보고 당황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말라. 그것은 그대 자신의 참자아에서 나오는 빛일 뿐이다. 이 사실을 깨달으라. 그 빛 한가운데에서 천 개의 천둥이 동시에 울리는 것처럼 존재의 근원에서 자연스런 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그것은 그대 자신의 참자아에서 나오는 자연스런 소리이다. 그 소리에 당황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말라. 지금 그대가 갖고 있는 몸은 살아 있을 때 생겨난 그대의 정신적 성향으로 이루어진 사념체이다. 그대는 사로가 뼈로 만들어진 육체를 갖고 있지 않으므로 어떤 것이 그대 앞에 나타나든지, 그것이 소리든 빛이든 광선이든 어떤 것도 그대를 해칠 수 없다. 그대는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환영들이 그대 자신의 생각에서 나온 것임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모두가 바르도에서 일어나는 현상임을 그대는 알아야 한다. 아, 고귀하게 태어난 자여. 만일 지금 그대 자신의 생각에서 투영되어 나오는 것을 바로 알지 못한다면, 그대가 인간 세상에서 아무리 명상 수행을 열심히 하고 신에게 헌신했다 할지라도 빛들이 그대를 당황하게 하고, 소리들이 그대를 두렵게 하고, 색체들이 그대를 무서워하게 만들 것이다. 따라서 그대에게는 이 가르침이 더없이 중요하다. 이 가르침이 중요한 열쇠를 알지 못하면 그대는 빛과 소리와 색체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윤회계를 떠돌게 될 것이다.
티베트 불교에서 석가모니 부처의 환생으로 믿고 있는 파드마삼바비는 자신의 수행의 정수를 담은 <<마음일기 요가>>(티베트 해탈의 서)를 통해 마음의 실체를 가장 알기 쉽게 제시하고 있다.
한마음은 진실로 공(空)이고 어떤 기반도 갖기 않으며, 그와 마찬가지로 개인의 마음도 하늘처럼 비어 있나니, 이것이 옳은지 그른지 알고 싶으면 그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라. 공이며 시작과 끝을 상상 할 수 없는 자발생의 지혜는 태어나지 않은 태양의 본성처럼 실재 속에서 영원히 빛나고 있나니, 이것이 옳은지 그른지 알고 싶으면 그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라. 신성한 지혜는 끝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결코 부서지지 않으며 파괴할 수 없나니, 이것이 옳은지 그른지 알고 싶으면 그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라. 하늘의 바람처럼 불안정한 흐름인 객관적 현상들은 홀리거나 묶을 힘을 갖지 않나니, 이것이 옳은지 그른지 알고 싶으면 그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라. 모든 형상은 사실 개인 자신의 개념이고 마음속에서 스스로 상상한 것이며, 거울에 비친 상(像)과 같나니, 이것이 옳은지 그른지 알고 싶으면 그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라. 외부의 모든 현상은 스스로 생겨나 하늘의 구름처럼 자연스럽고 자유로우며 제각기 저마다의 처소로 사라지나니, 이것이 옳은지 그른지 알고 싶으면 그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라.
파드마삼바바는 <<마음알기 요가>>에서 ‘세상 모든 것이 본성의 환영이고, 불만족스러운 것임을 깨달아 그것들에 더 이상 속박되지 않고 해탈할 수 있는 길’을 보여준다.
탄트라 불교에선 수행이 깊어지면 동시에 수천 수만의 분신으로 나타나는 것도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정광명과 분신을 중득한다고 해서 구경성불(究竟成佛)에 이르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때도 여전히 미세한 장애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광명과 환신을 중득한 상태에서 공관을 계속해서 지혜를 얻고, 분신을 통해 동시에 수많은 공덕을 지음으로써 미세한 장애를 제거할 때 비로소 절대 공성을 체득할 수 있다고 본다.
그때는 영원히 정광명 상태에 머무는 법신, 완벽한 환신을 성취해 부처가 취할 32장 80종호를 구족한 보신, 중생 제도를 위해 삼계에 자재하게 출몰하는 화신 등 3신을 갖추게 된다. 티베트 불교에서 구경성불은 일시에 모든 현상의 본질을 꿰뚫는 지혜를 중득하고, 삼매 상태를 깨뜨리지 않으면서 어떠한 행위도 가능한 경지를 말한다.
다람살라의 골목길을 걷다가 우연히 한국인 은둔 수행자를 만났다. 그는 사람들과의 대면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고 외부에 이름이 알려지는 것도 원치 않았다. 티베트 불교의 수행을 통해 윤회를 확실히 믿게 된 그는 자신이 다시 윤회하게 된 것도 명예를 탐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번 생에서도 그런 습관을 끊지 못했다면 윤회의 사슬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으므로 오직 수행에만 정진할 뿐 메스컴에 얼굴을 내밀어 또 다시 업을 쌓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여러 얘기중에 그는 고려대를 졸업한 뒤 범어사로 출가해 성철 스님, 구산 스님 등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선승들 밑에서 참선 수행을 했으나 진전이 없어서, 인도로 건너와 라티 린포체에 귀의해 수행해왔다고 고백했다. 그 또한 달라이 라마를 수행자로서 존경하고 있었다. 달라이 라마의 환생에 대해선 확신에 차서 말하기도 했다.
그의 말에 내가 의문을 제기했다. “달라이 라마의 14대 화신으로 일컬어지는 현재의 달라이 라마 본인조차 자신의 환생에 대해 분명하게 밝히지 않고 있고, 기껏 ‘내가 어렸을 때 13대 달라이 라마가 사용하던 물품들을 즉시 알아보았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할 뿐인데, 과연 그를 환생자로 볼 수 있는가?”라고.
이에 대해 그는 “만약 달라이 라마가 과거의 기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를 만나는 사람마다 오직 과거 얘기만 해달라고 조르며, 과거에만 집착하는 어리석음을 불러올 것”이라며, “달라이 라마가 깊은 명상에 들면 면면히 이어져온 자신의 전생을 확연히 볼 수 있으며, 그를 진심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은 그러한 증거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티베트 밀교는 오직 마음 수행에만 전념하는 우리나라의 수행과 달리 몸과 마음을 둘로 보지 않고, 마음이 깨달으면 몸 또한 함께 그러한 증명을 나타낸다고 보는 입장이고, 그런 수행을 하나하나 체계적으로 해나간다.
불현듯 그토록 궁금했던 전후생을 따져보는 것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옛말에 어떤 사람이 오늘 받는 업을 보면 그의 과거를 알 수 있고, 오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의 미래를 알 수 있다고 했다. 달라이 라마의 전후생을 지금 그의 삶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