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야의 상록수

문화원장의 임기가 한 달여 남았다. 마지막 문화탐방을 어디로 가면 좋을까를 곰 새겨 보았다. 대미를 장식하는 의미와 함께 우리지역의 자랑거리인 필경사筆耕舍를 회원들에게 각인시킬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상록수에 등장하는 채영신의 실제인물 최용신을 기리는 안산의 상록공원과 묶어가기로 했다. 일정상 인근의 평택항 안보공원에 들르는 일정을 확정했다. 상록수의 주인공 박동혁과 연평해전에서 전사한 박동혁병장은 이름이 같은 다른 사람이라서 ‘박동혁 찾기’를 테마로 정했다.
당진에서 서해대교를 건너면 평택인데 제2함대가 자리한 안보공원을 이제서야 찾는데서 주변머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행 삼십여 명 중 이미 다녀온 사람은 세 명에 불과했다. 연평 해전과 천안함 사건 등 불운의 민족사로 희생양이 된 벽에 걸린 꽃다운 나이의 장병들 사진을 보면서 그들을 가슴에 묻었을 부모님들의 심경을 헤아려 보았다.
처참하게 부서져 형체를 분간하기 어려운 천안함의 잔해를 설명으로 듣고 살펴보면서 정전상태인 한반도의 정세를 실감했다.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의제를 포함하여 남북 정상회담이 4월 27일로 예정되어 있으니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이 싯점에 안보견학을 계획한 것도 탁월한 선택이지 싶었다.
불과 사십여 분을 달려 안산의 최용신기념관에 도착했다. 상록공원 안에 기념관과 최용신 묘소가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암울했던 시기에 독립운동과 계몽운동에 젊은 몸을 바친 선각자의 숨결을 더욱 크게 느낄 수 있었다. 함경남도 덕원에서 태어나고 선생의 나이 22살 때 안산으로 내려와 ‘배워야 한다. 가르쳐야 한다’ 고 외쳤던 생전의 모습이 이틀 전에 92세의 나이로 타계하신 최은희 주연 영화 ‘상록수’에 오롯이 담겨있었다.
필경사 탐방을 마지막 코스로 한 일정을 서녁해는 기다려 주지 않았다. 해설사를 붙잡아 두고 내 고장 필경사에 도착한 시각은 약속시간을 한 참 지나서였다. 심훈선생의 묘소 앞에서 일행은 묵념으로 예를 올리고 경내를 관람했다. 필경사는 심훈선생께서 직접 짓고 2년간 사시면서 소설 상록수를 집필하신 집인데 당시 일본의 영향을 받았는지 실내에 화장실과 목욕실을 갖추고 있었다.
필경사 앞에 아름다운 기와집이 버티고 있는데 그곳이 상록수기념관이다. 상록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배경, 상록수정신, 그 후로 이어지는 상록학원의 역사와 공헌, 사회에 미친 영향 등을 연구 전시하고 있었다.
상록수기념관 옆으로 2014년에 건립한 이백여 평의 아름다운 신축 건물이 심훈기념관이다. 심훈선생의 일생, 항일정신, 나라사랑의 발자취를 소개하며 영화인으로, 시인으로, 소설가로서 살다간 인간 심훈의 계몽정신을 후세에 선양하기 위해 개관되었다. 심훈의 삶을 시詩작법 구성방식인 기, 승, 전, 결 4단계로 간결화하여 구성하고 중앙에 대표작품을 담고 있는 형식으로 구성한 설계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심훈은 1932년 아버지의 고향인 당진의 부곡리로 내려오게 된다. 소설 상록수는 농촌계몽운동을 하고 있던 그의 장조카 심재영을 박동혁으로, 안산에서 농촌계몽운동을 하고 있던 최용신을 채영신으로 분扮하였다. 두 사람이 어떤 발표회에서 만나면서 농촌계몽운동은 더욱 탄력을 받게 되고 자연히 사랑이 싹 트게 되는 줄거리이다.
장편소설 상록수가 동아일보에 선정되고 불후의 명작 ‘그 날이 오면’, ‘영원의 미소’, ‘직녀성’, ‘황공의 최후’, ‘오오 조선의 남아여’ 등을 발표한다. 붓끝을 벼리던 심훈은 장질부사에 걸려 36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지게 된다. 최용신도 샘골(현 상록구 본오동)강습소를 중심으로 농촌계몽운동을 하다가 2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왜 하필이면 이들이 젊은 나이에 요절을 하게 되었을까.
안산의 상록공원은 도시개발로 주변이 아파트 숲으로 둘러쌓여 주차장도 없는 섬으로 변해 있었다. 필경사도 주변에 공장굴뚝이 흉물로 서 있고 악취와 매연이 명소의 이미지를 흐리게 하고 있다. 게다가 진입도로는 차량교행이 불가한 좁은 도로라서 외지에서 찾아오는 관람객에게 민망하기가 짝이 없는 실정이다.
최용신이 함경북도에서 태어났음에도 이를 기리는 안산시민의 성의는 대단하다. 상록구가 있고 상록공원이 있고 상록역이 있다. 심훈이 상록수를 집필한 필경사는 전국의 어느 문학관, 기념관보다도 위대한 성지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성지를 잘 보존하고 편의시설을 제대로 갖춰서 애국정신을 고취하는 일에 모두의 힘을 모으면 좋겠다.
주변의 포구는 갈매기 날고 낚싯배가 드나들던 낭만의 바다였다. 어쩌다가 공업단지로 변한 지금 의지만 있다면 친환경 공단으로 재탄생할 수도 있다. 주변에 방치되어 있는 상록수공원을 명소로 가꿔서 당진시가 매년 개최하는 상록문화제를 그 일대에서 치르면 좋겠다.  안산의 원시와 홍성을 잇는 서해안선 고속전철이 2020년에 개통되면 당진과 안산은 30분대의 거리로 짧아지면서 상록수길이 될 것이다.
공단에서 내뿜는 매연과 소음이 저녁엔 어떤지 살피기 위해 야간에 필경사를 찾았다. 심훈선생이 책을 펼쳐 보고 있는 동상에서 선생의 피 끓는 애국애족 혼을 느낄 수 있었다. 박동혁, 채영신이 십자가에 매달린 종을 치고 서있는 모델이 은은한 달빛에 비추이는 모습에서 새마을 운동의 종소리가 이명耳鳴으로 들리는 듯했다. 암울했던 시대에 조국을 되찾고 문맹퇴치를 위한 길에 젊음을 바쳤던 두 거장이 상록수 되어 월야(月夜달밤)의 그림자로 내 발길을 따라오고 있었다.
(2018. 0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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