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 경계구나!
수도인이 경계를 피여
조용한 곳에만 마음을 길들이려 하는 것은
마치 물고기를 잡으려는 사람이 물을 피함과 같나니
무슨효과를 얻의로,
그러므로 참다운 도를 닦으려면
오직 천만 경계 가운데에
마음을 길들여야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큰 힘을 얻으리라.
-소태산 대종사
서울 봉천초등학교의 한 교실, 종달새처럼 재잘대는 아이들 건너로 칠판 위의 글씨가 눈에 띈다.
“나는 원래 훌륭한 사람입니다.”
천방지축으로 교실을 헤집고 다니며 떠드는 이 어린아이들이 과연 자기 마음을 챙길 수 있을까,. 그런 의문이 사그라지는 데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앞자리에서 유난히 떠들썩한 승준이. 아이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변 친구들을 공포로 몰아넣은 주먹대장이었다. 자주 승준이에게 맞았던 병훈이는 학교에 가는 것조차 꺼릴 정도였다.
담임선생님의 지도로 마음공부를 시작한 지 2개월. 그동안 승준이는 믿기 어려울 만큼 변했다. 승준이의 일기가 그의 변화를 실감케 한다.
대희가 화장실에서 내 옷에 물을 뿌렸다. 나는 화가 났다. 내가 좋아하는 옷이었다. 때리고 싶었지만 안 때렸다. 대희가 모르고 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제 경계를 알아차릴 뿐 아니라 잘못을 저지른 상대의 처지까지 헤어린 것이다. 다복이의 일기에도 이런 ‘이해’가 담겨 있다.
산에다 밭을 만들었다. 돌이 많아 허리가 너무 아팠다. 아빠에게 집에 가자고 그랬는데도 ‘다 만들고 가자’ 고 했다. 나는 경계가 왔다. ‘앗! 경계구나’ 하고 아니까 화를 안 낼 수 있었다. 왜 그랬을까. 아하! 아빠가 한꺼번에 일을 끝내려고 그랬구나!
일기장에 빨간 글씨로 “그렇게 마음을 잘 챙기다니 참으로 훌륭하구나”라고 써서 기를 살려주는 선생님의 ‘(문답)감정’ 때문에 아이들은 더욱 신나게 ‘경계’를 챙겼다.
짜증이 나거나, 고통스런 상황이 발생했을 때 승준이만큼 산란해진 마음을 곧바로 챙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원불교를 창시한 소태산 대종사는 선과 깨달음에 대해 명쾌하게 밝혀놓았을 뿐 아니라, 생활 속에서 마음을 쓰고 평정을 유지하는 용심법(用心法), 즉 마음을 쓰는 법도 제시했다.
용심법은 현실 속에서 사람들이 세상 경계를 거울 삼아 수행을 하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한 것이다. 경계란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온갖 사람과 상황들을 말한다.
마음공부란 마음을 살피는 것이다. 경계가 왔을 때 ‘일어난 마음’과 이 마음이 일기 전의 평온했던 ‘본래 마음’을 대조해보고, 시비 분별과 차별이 없는 원래 마음의 위치에서 흐렸다, 갰다 하는 마음을 보는 것이다. 한 마디로 짜증 나는 일이나 싫은 경계가 왔을 때 요란해지고 어리서거지도록 두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순간 정신을 차리는 공부인 셈이다. 소태산은 경계 따라 변화하는 마음의 원리를 밝혀 수행법으로 내놓고 그에 따라 모든 마음의 뿌리인 근본으로 돌아가게 했다.
심지(心地)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요란함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自性)의 정(定)을 세우자.
심지는 원래 어리석음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어리석음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혜(慧)를 세우자.
심지는 원래 그름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그름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계(戒)를 세우자.
본디는 ‘없건만’ 경계 따라 ‘일어났다 사라지는’ 마음의 원리를 살펴 많은 수행자들이 찾아 헤매던 ‘시비 분별이 없는, 한 생각이 일기 바로 전의 자리’ 인 원래 마음으로 돌아가게 한 것이다. 짜증 나는 경계가 왔을 때, “짜증 나기 직전의 마음은 ‘짜증이 난다, 안 난다’ 하는 마음이 없었지”라고 알아차려서 분별 없고, 원래 마음을 지키는 것이다.
원불교의 마음공부는 세상 경계를 모두 공부 삼기 때문에 깨달음을 위해 속세를 떠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세상이 공부의 가장 좋은 터전이다.
마음일기는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고 기재한 뒤 지도자에게 감정을 받아 평정과 깨달음을 얻도록 하고 있다. 따라서 현대인들 누구나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수행자들도 수십 년의 수행으로 얻지 못한 자기 변화를 일반인들이 체감할 수 있다.
봉천초등학교의 마음일기는 담임선생님의 오랫동안 마음공부 모임에서 마음을 살피며 자신감을 얻은 뒤 교육현장에서 아이들의 인성 지도에 활용하게 된 것이다.
마음일기는 반성 위주의 일기와는 다른 큰 변화를 실감하게 한다. 봉천초등학교에서 밥투정에, 짜증에, 형제싸움을 일삼던 아이들이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것에 가장 놀란 사람은 부모들이었다.
처음엔 마음공부란 얘기에 ‘별 희한한 것도 다 한다’며 마뜩찮아 하던 학부모들이 마음일기로 아이들이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자신들도 마음공부를 하겠다고 나섰다. 윤미 엄마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상을 휩쓰는 오빠에 비해 자기는 잘하는 게 없다며 항상 열등감에 쌓여 있던 윤미가 변하기 시작했어요. ‘경계’에 따라 일을 잘못할 수도 있고, 화도 낼 수 있지만, 원래 자기 마음은 훌륭하다는 거예요.”
윤미 엄마는 자신감을 갖고 당당해진 윤미의 변화에 놀랐다. 펀드매니저인 남편을 생각하며 주가가 오르내릴 때마다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해 괴로워했던 곤이 엄마도, 아이의 예의 없는 행동을 참지 못했던 찬우 엄마도 마음공부에 동참했다.
다빈이는 엄마의 마음공부 덕에 살 판이 났다. 다른 아이에게 지는 것을 절대 용서하지 않고, ‘일등’과 ‘세계 최고’만을 강요하던 엄마가 너그러워진 것이다.
“내 마음을 살피고 보니 내가 못다 푼 욕심을 다빈이를 통해 풀려고 했더군요. 다빈이의 삶을 살게 한 것이 아니라 내 맘대로만 하려고 했더라고요.”
부모의 스트레스는 아이의 스트레스가 되게 마련이다. 친구에게 져서는 안 된다는 엄마의 엄명 때문에 친구에게 뒤질 때마다 인상을 쓰곤 했던 다빈이가 엄마의 눈치를 슬슬 살피던 것에서 벗어나 순진무구한 본래 모습을 되찾았다.
형욱이 엄마가 매일 마음일기를 쓰게 된 것도 형욱이의 나쁜 습관이 딱 고쳐지는 놀라운 일을 겪고부터다. 형욱이가 하굣길이나 학원에 오갈 때 틈만 나면 피시방에 들어가 오락에 정신을 팔곤 해서, 엄마는”차라리 집을 나가버리라”고 윽박지르는 일이 예사였다. 그랬던 형욱이가 피시방 발길을 뚝 끊은 것이다. 엄마는 형욱이의 일기를 보고서야 형욱이가 위기의 순간에 마음을 챙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태권도를 마치고 집에 곧장 가지 않고 피시방에 들어갔다. 그때 ‘앗! 경계다’라고 생각하고 집으로 갔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그것은 바로 집에 가기 싫은 경계가 와서 그랬다는 것을 알았다.
형훈이 엄마도 다빈이 엄마 못지않게 자기 아이가 지는 것을 눈뜨고 못보는 성미였다. 졌다는얘기를 들으면 혼을 내는 엄마 때문에 형훈이는 친구들을 칭찬하는 법이 거의 없었다. 그런 형훈이가 어느 날부턴가 친구들을 칭찬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두들겨 팼던 승준이를 “이제 얼마나 착해진 줄 아느냐”며 도리어 변호하기에 바빴다.
“형훈이가 늦게까지 어울리곤 하는 친구가 영구임대 아파트에 산다는 얘기를 듣고, ‘함께 놀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형훈이가 ‘엄마는 그 애가 얼마나 마음도 잘 챙기고 착한지 몰라서 그런다’며 꼭 그 아이의 마음일기 발표를들어보라고 해서 학교에 왔다. 일기를 듣고, 선입견으로 그 아이를 차별한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편견 없이 친구를 사귀는 형훈이가 자랑스러웠다.”
형훈이 엄마는 천진난만한 미소를 머금은 형훈이를 안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마음공부 일기의 효과가 알려지면서 다른 종교인들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마음일기가 확산되고 있다. 특히 ‘교실 붕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심각한 교육현장에서 마음일기가 학생들의 인성교육 프로그램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세계경제개발기구(OECD)에 의해 ‘세계 4대 열린 학교’에 선정된 영산 성지고를 비롯한 화랑고, 원경고 등 원불교에서 부적응 학생들을 모아 출범했던 대안학교의 교육 비결도 교사와 학생들이 모두 참여하는 마음공부에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학생들의 마음공부를 위해선 지도교사가 일일이 일기를 보고, 지도하는 정성을 쏟아야 한다.
일기 감정은 선생님과 학생들이 마음 나누는 방이 된다. 학생들이 선생님, 교우들, 부모자식 간의 문제에서 마음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고, 지도할 수 있다. 일기 감정은 훈계를 하라는 것이 아니다. 경계를 해결해가면서 어려운 결단을 내릴 때는 격려해주고, 더 넓고 깊은 안목을 가질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스승이 제자의 깊은 마음과 아픔을 헤어려 그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스스로 옭아맨 사슬의 빗장을 열게 하는 것이다.
원불교 3대 종법사인 대산 종사의 애제자인 장산 종사는 원불교 웃어른들의 마음공부법을 일반 대중에게 널리 전하고 있다.그는 관세음보살과 같은 감화력으로 마음공부하는 수행자들의 업을 녹이는 듯 했다. 마음일기를 몇 마디만 들어도 공부인의 심중을 꿰뚫어보았고, 단 한두 마디로 그의 마음을 어루만지곤 했다. 그의 말을 들으면 공부인들은 그 자리에서 상처가 녹은 듯 눈물을 흘렸다.
다음은 한 학생의 일기와 선생님의 문답 감정이다.
학생의 일기
교무실에 들어갔다.선생님께서 수학경시대회에 나가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보셨다.난 수학은 못하지만 한번쯤은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미진이가 선생님께 “규상이가 더 잘할 텐데, 규상이가 하는게 낫지 않아요?”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난 순간 기분이 너무 나빴다. 내가 규상이보다 수학을 못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게 꼭 집어서 말하는 미진이에게 섭섭했다. 그래서 나는 “저보다는 규상이가 하는 게 좋겠네요. 그렇게 하세요”라고 말했다.
곧장 교실로 내려와서 마음 대조를 했다. 미진이는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나는 그 말을 듣고 미진이에게 섭섭함을 느꼈다. 그것은 내가 경계에 끌렸다는 말이다. 미진이에게 섭섭했던 내 마음이 점점 이해가 됐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길 나 스스로 수학을 못한다는 생각에 붙잡혀 있어 미진이가 하는 말에 심각하게 반응했을 것이다. 난 옛말에 뭐한 놈이 더 성낸다는 말이 생각났다. 내가 수학을 못하니 찔려서 미진이에게 더 섭섭함을 느꼈을 것이다.
웃음이 절로 난다. 아무튼 이번 경계도 잘 넘어갔다. 하지만 앞으로 수학공부는 좀 해야 할 것 같다.
선생님의 감정
마음공부는 아직 늦지 않은 순간에 지혜롭게 해결하는 공부입니다.
마음이 섭섭해지는 순간,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마음공부해서 지혜롭게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네요. 화가 나는 순간 멈추어 차분하고 냉정한 마음으로 경계를 다시 살피니, 바르고 지혜로운 인식에 도달하게 되지요. 자기 마음 잘 살폈습니다.
마음공부는 경계를 대할 떄 어떤 상태여야 한다는 생각이나 전제로 자신을 괴롭히지 않는다. 요란함을 문젯거리라며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요란함을 공부거리로 삼는 것이다. 원불교 교조 소태산도 경계를 자연스럽게 보고 있음을 <<인과품因果品>>에서 밝히고 있다.
천지의 일기도 어느 때에는 명랑하고 어느 때에는 음울한 것과 같이, 사람의 정신 기운도 어느 때에는 상쾌하고 어느 때에는 침울하며, 주위의 경계도 어느 때에는 순하고 어느 때에는 거슬리나니, 이것도 또한 인과의 이치에 따른 자연의 변화다. 이 이치를 아는 사람은 그 변화를 겪을 때에 수양의 마음이 여여하여 천지와 같이 심상하나, 이 이치를 모르는 사람은 그 변화에 마음까지 따라 흔들려서 기쁘고 슬픈 데 괴롭고 즐거운 데에 매양 중도를 잡지 못하므로 고해가 한이 없다.
“요란한 줄 아는 이 영지(靈知)는 원래 요란함이 없구나! 어리석은 줄 아는 이 영지는 원래 어리석음이 없구나! 그른 줄 아는 이 영지는 원래 그름이 없구나! 하고 알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소태산은 선방에 앉지 않으면 수행할 수 없다는 기존의 고정관념을 뒤집었다. 선에 대한 고정관념이 가져온 폐단 또한 냉철히 꼬집었다.
근래에 선을 닦는 무리가 선을 대단히 어렵게 생각하여 처자가 있어도 못할 것이요. 직업을 가져도 못할 것이라 하여, 산중에 들어가 조용히 앉아야만 선을 할 수 있다는 주견을 가진 사람이 많나니, 이것은 제법이 둘 아닌 대법을 모르는 연고라. 만일 앉아야만 선을 하는 것일진대 서는 때는 선을 못하게 될 것이니, 앉아서만 하고 서서 못하는 선은 병든 선이라 어찌 중생을 건지는 대법이 되리오. 뿐만 아니라 성품의 자체가 한갓 공적에만 그친 것이 아니니, 만일 무정물과 같은 선을 닦을진대 이것은 성품을 단련하는 선공부가 아니요. 무용한 병신을 만드는 일이다. 그러므로 시끄러운 데 처해도 마음이 요란하지 아니하고 욕심경계에 대하여도 마음이 동하지 아니하여야 이것이 참 선이요, 참 정이다.
‘무시선(無時禪) 무처선(無處禪).’ 선을 하는 시간과 장소가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이 소태산의 가르침이다.
나 역시 취재하면서 간접적으로 경험한 마음일기를 매일 경계가 올 때마다 직접 써보았다. 과연 머리로만 생각하는 것과 직접 써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한 취재처에서 취재원들과 뒤풀이를 했다. 막걸리와 맥주잔이 돌아가면서, 흥겨운 노래를 부른다. 한 사람씩 돌아가며 노래를 부르는데, 예외 없이 노래를 시켰다. 내 차례가 두세 명 앞으로 다가오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앗! 경계다.
원래는 없었건만 ‘내 차례’가 가까워오니, ‘노래를 시키면 무슨 노래를 불러야 하지’ 또는 ‘처음 만나는 사람 앞에서 가사를 제대로 아는 노래 하나 없으면 무슨 창피지’라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나니, ‘내 차례가 곧 온다’고 생각하 이전의 편안한 마음으로 돌아가서 나를 지켜보자. 이런 공식에 따라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
마음일기를 자주 쓰다 보니 내 마음이 더욱 확연히 보인다. 상대가 내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거나, 존대하지 않았다거나, 무시했다거나 하는 생각으로 화가 나기도 한다. 또 상대가 잘난 체 하는 모습이 보기 싫기도 하고, 잘난게 보기 싫기도 하고, 못난 것이 보기 싫기도 한다.
그렇다고 자기 마음을 애써 책망하거나 반성하는 게 이 공부의 목적은 아니다. 원래 마음은 훌륭한 것도, 거룩한 것도, 더러운 것도, 치사한 것도 아니므로 상황에 따라, 생각 따라 일어났다 사라질 뿐이라는 마음의 원리를 확연히 깨달아 ‘일어나기 전’의 원래 마음을 지키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일어난 마음을 자기 것이라고 붙잡고 있다 보면 계속 화가 날 뿐 웃음이 나올 수는 없다. 자신의 마음이 치사하든 어떻든 개의치 않고 거울처럼 비춰볼 수 있다면 경계에 노예처럼 끌려다니지 않는 것이다.
화가 나거나 상대방에 대한 미운 감정이 들 때 그 뿌리를 살펴보면 정말 사소한 것으로부터 화나 미움이 시작됨을 알 수 있다. 자기를 ‘도덕적인 사람’이라는 틀에 가두지 않고, 상황에 따라 능히 부처나 예수처럼 선해질 수도 있고, 또 능히 살인자처럼 분노와 살심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들어가면, 그냥 마음을 바라볼 수가 있다.
마음은 놓치기 일쑤인 현대인들에겐 일기가 수행의 좋은 방편이 될 수 있다. 일기를 자주 쓰다 보면, 뒤늦게 일기를 쓸 때에야 마음을 챙기다가 차츰 경계가 오는 순간 마음을 챙기게 되고, 경계에 끌려서 마음 고생하는 일이 현저히 줄어든다.
경계란 무엇인가? 한 청년이 귀걸이를 하고 지하철에 들어서는 것을 보면 ‘참 꼴불견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때 마음을 관찰하면 자기 마음 안에 꼴불견이라는 생각이 일어나고 있는 마음 상태를 볼 수 있다. 아, 저런 모습엔 볼썽사납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청년이 볼썽사납다느니, 볼썽사납지 않다느니 하며 시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보고 내 마음에서 일어난 것을 지켜보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저런 사람을 보면 볼썽사납다는 마을 일으키는 구나’, ‘나는 남자가 귀걸이를 하면 좋지 않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구나’ 깨닫게 된다.
그것은 교육이나 주위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 받은 고정관념이지 원래부터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만약 내가 아프리카에서 태어났다면 청년들이 귀걸이, 코걸이를 하고 다니는 것을 당연히 여기고, 오히려 그런 것도 하지 않고 거추장스럽게 옷을 걸치고 다니는 사람들을 이상하게 바라볼 것이다. 우리는 우리대로, 그들은 그들대로 자기의 고정관념대로 판단하고 분별하고 시비하는 것이다. 거기엔 어떤 것이 옳다느니, 그르다느니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런 관찰을 계속하다 보면 대상의 좋고 나쁨이나, 선하고 착함이 있는 게 아니라 나의 고정관념에 맞으면 좋다거나 아름답다거나 선하다는 마음을 일으키고, 나의 고정관념에 맞지 않으면 좋지 않다거나 추하다거나 악하다는 마음을 일으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대상에 선악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선악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결국 경계 때문이 아니라 나의 주관 때문인 것이다. 즉 나의 편견, 나의 고정관념이 분별의 잣대가 되어 좋다는 마음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싫다는 마음을 만들어내기도 하는 것이다.
사실 경계는 어떤 것도 나를 괴롭힐 힘이 없다. 경계는 내가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정관념이나 편견과 같은 마음의 틀을 놓아버릴 때 자성의 정이 세워진다.
소태산 대종사는 “성품은 원래 청정하나 경계를 따라 순하게 발하면 선이 되고 거슬러 발하면 악이 되나니, 이것이 선악 분기점”이라고 했다. 경계는 내가 만든다는 점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것이다. 일어나는 마음도 내가 창조하는 것이다. 나는 모든 감정의 주인인 것이다.
나치 독일의 유태인 수용소에 갇혀 있던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최후 선택이 “경계”가 아닌 자신에게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프로이트 심리학을 배운 빅터 프랭클은 ‘운명론자’였다. 그는 어릴 때의 사건들이 인간의 성격과 성품을 결정짓고 개인의 삶 전체를 지배하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삶을 어찌 해볼 도리가 없다는 프로이트 학설을 믿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나치 수용소에서 결정적인 변화를 맞았다.
부모형제와 부인이 수용소에서 죽거나 가스실로 보내지고 자신도 언제 가스실로 보내질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였다. 어느 날 그는 작은 감방에 홀로 발가벗겨진 채 있다가 자신이 후에 ‘인간이 가진 가장 마지막 자유’ 또는 ‘나치들도 빼앗아갈 수 없는 자유’라고 이름 붙인 상태를 자각하기 시작했다. 나치들은 그의 주변 환경 전체를 통제하고, 원하는 대로 그의 육체를 다룰 수 있었지만 프랭클은 자신의 상태를 관찰자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제 수용소의 모든 일들로부터 영향을 받고 안 받고의 여부는 자기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었다.
그의 상황, 즉 경계는 변한 게 없었으나, 자신에게 일어난 것, 즉 자극과 그것에 대한 반응 사이에서 바로 그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즉 권한을 얻었던 것이다. 그 결과 그런 경계에도 불구하고 고통이 아닌 자유와 평안을 창조할 수 있었다.
결국 마음공부를 하는 데 순간순간의 경계를 실상으로 보고 끌려다니며 거기에만 대응하는 것은 경계의 힘을 인정하는 것이다. 경계에 끌려다니지 않고 자성을 세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공부다. 경계란 내가 만든 허상. 이 허상에 빠지지 않고 자성의 위치에 서서 어떤 경계로부터도 자유로워지는 것. 마음공부엔 이런 대자유가 기다리고 있다.
만약 경계가 왔을 때는 당연히 고통스러워야 한다는 결정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빅터 프랭클은 심리적 고통 때문에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 그것이 그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우리의 위대함이다.